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간 개복치 Oct 04. 2019

사이코패스도 '정신병자'도 아니다, 조커

아서 플렉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영화 조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을 남긴다.

대단히 잘만든 영화인 것은 사실이나 그 때문에 감상평을 남기는 건 아니다.


1.

조커는 약자를 향한 세상의 폭력을 천천히 현실적으로 끈질지게 보여주는 영화다. 폭력에 당하는 과정에서 약자가 느끼는 감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감독 혹은 배우 둘 중 하나는 이런 류의 폭력을 직접 당했거나 어떤 경로로 잘 아는 것 같다.


2.

나 개인은 어릴 적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어린이들의 세상은 은근히 전쟁터라 작은 다름에도 타자화시키며, 타자로 인식된 이는 힘의 유무에 따라 공포의 대상 혹은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빼빼 마르고, 말 더듬던(사실 혀도 좀 짧다) 나는 약간의 괴롭힘을 당했다.


낯을 많이 가렸음에도, 부모님의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조언에 최대한 웃으며 다가갔다. 하지만 그 친절은 만만함으로 여겨지고 폭력으로 돌아왔다. 대단한 폭력은 아니었고, 내 물건 던지고 놀리고, 밀치기, 지속적인 비하 발언 정도.  덩치가 커지고, 학업 성적도 올라가며(?) 폭력은 사라졌다... 인간의 간악함이란.


자잘한 악의지만 당사자에겐 큰 고통

3. 감독이 조커를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낸 것이 고마웠다. 이 영화 속 조커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사이코패스는 세상사를 단순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다. 무식한 사람이란 소리가 아니라, 아주 평면적인 시선으로 세상사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사이코패스에 대해선 조안 캐롤 오츠가 쓴 소설 <좀비>의  박찬욱 감독 서평으로 대신한다.


『좀비』는 악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지다. 그렇다고 독자에게 악덕을 설득하거나 악행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는다. 악을 권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보기보다 위험한 책은 아니다. 차라리 『좀비』는 독자로 하여금 잠시 그 악인이 되어보도록 한다. 이건 추천장도 아니고 사용설명서도 아니고 초대 편지도 아니다. 입체영상을 보게 해주는 안경 같은 것이다. 이걸 쓰면 사이코패스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 어쩌면 반대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입체로 존재하는 세상이 이 안경을 끼면 평면으로 보인다. 사이코패스의 시선은 매우 폭력적으로 세계를 단순화하니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짧고 멋 안 부리는 문장 덕에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연쇄강간살인범이 될 수 있다. 그냥 미끄럼 타고 내려가듯 악의 심연에 뚝 떨어진다. 악은 이토록 쉽고 간결하고 명쾌한 것이던가, 어리둥절해질 지경이다. 악의 화신이 된다는 건 전혀 어렵지 않더라. 타인들을 입체로 보지 않는 것, 오로지 자기만 들여다보는 것, 제 욕망만을 보는 것. 단순화, 평면화, 내면화, 그리고 단절.

- 박찬욱


조커는 평면의 안경을 쓴 채 세상을 보지 않는다. 배움은 짧을 지언정 타인의 눈으로 세상으로 보려 노력한다.


세상에 어떻게든 적응해보려는 아서


4. 심지어 흔히 말하는 '정신병자(비하 용어)'인지도 모르겠다. 뇌에 문제도 있고 그래서 환상을 보기도 한다. 조현병이라 보는 게 의학적으론 맞다. 하지만 그가 겪고 반응하는 방식은 '정상인'인 우리가 봐도 이해 가능하다.


정신질환의 핵심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 논리인데(저 사람이 밥 숫가락을 드는 것은 나를 비난하는 행위다, 류), 아서 플랙은 언행 하나하나가 이해간다. 그렇기에 관객도 감정을 이입하고, 영화 속 다른 '광대'들도 추앙하게 되는 것이다.


5. 보는 내내, 사회의 메인 스트림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대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삐끗했으면 나도, 조커처럼 빌런은 아닐지라도,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더욱 삐뚤어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약자이거나, 한때 약자였던 사람들이 보면 더욱 울림이 클 영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