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금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쌩전 May 21. 2024

불편할 수 있는 용기

산책과 커피 : 독립 마케팅 스튜디오의 넋두리 다이어리 3

못해서 미루는게 아니라 하기 싫어서 미루는 건 참 못된 버릇이다. 나에게도 못되고, 남에게도 못된 버릇인걸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질 않는다. 부지런하기 위해선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와야 하는데, 일을 하다보면 쌓여있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게 된다. 내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영역은 바로, 불편한 상황을 이겨내는 일이다.


오늘도 이래저래 불편한 순간들이 많았다. 어찌보면 일을 한다는 것은 불편함의 연속이다. 세상에 예측 가능하고, 마음처럼 되는 일이 대체 어디있을까. 잘 안되니까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전문가가 있는 것일테다. 하지만 모두가 상대가 실수하지 않기를, 문제없이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 사고라고 부르기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기에는 신경이 쓰이는 일들 말이다.


촬영을 위해 한 공공기관에 갔는데 예측하지 못했던 절차가 누락되는 바람에 1시간 넘게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결국 들어가긴 했지만, 정작 같이 갔던 스태프 한명은 또 출입증 신청이 누락되어 들어가지 못했다. 급하게 진행되는 건이 있어서 아사모사 진행했던 계약의 디테일한 문제 때문에 발주를 기다리게 하고, 에이전시를 재촉했다. 결국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모두에게 쪼이면서 모두를 쪼아야 했다. 원래는 없었던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처음으로 생길뻔했다. 이것뿐인가, 크고 작은 것을 모두 나열하자면 너무 많다. 오늘이 유독 그런 날이라서? 아니, 그냥 일하는 날은 늘 그렇다.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자리에 앉아 한숨돌리고 나면, 작업할 것들이 떠오른다. 체크박스가 비어있는 체크리스트가 나를 마주하고 있다. 언제 할거야? 해야지, 해야지 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진행했던 순간의 피로가 나를 지치게 한다. 가만히 체크리스트들을 바라본다. 꼭 오늘 안해도 되잖아? 그렇게 내일이 된다.


그렇게 쌓인 내일이 모여 오늘이 되었다. 이동하다가 택시에서 보았던 숏츠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말고 노트에 해야할 일들을 손으로 적어보라는 이야기를 하는 한 외국인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은 신경쓰지말고, 중요한 것부터 꼭 해야하는 것부터 하나씩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오후 7시, 이제 일을 좀 시작해볼까 하고 하나하나 적어보았다. 총 11개의 해야할 일이 있었다. 지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창 ‘미움 받을 용기’가 유행이었던 적 있다. 사실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만한 얘기였다. 착한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하느라 자신을 갉아먹지말고,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말고 자신을 지키라는 이야기 아닐까? (아니라면 송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엔 거기에 더 나아가서, 그냥 나의 불편함에서 피하기 위해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거 같다. 미움 받던 말던, 그냥 내가 불편하면 얘기해야지, 뭐! 나는 그런 태도가 꼭 나쁘다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좋은 신호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기본적으로 ‘불편함’이 싫다. 불편함을 제거한다고 편해지진 않을테지만, 일단 최대한 안락한 상황보다는 최소한의 불편함의 상황을 더 선호하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타인의 불편함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앗, 저 사람 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이 상황을 그냥 말하긴 좀 불편한데? 그럼 나는 에둘러서 말하기도 하고 상황을 회피하려 하기도 한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면서 진행되는 일들도 있기도 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편해?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함을 느낄 때 꼭 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불편함을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게 사회생활 2-3년차 때 배운 일이기도 하다. 실수를 자주하면 안되지만, 중요한 문제라면 불편함을 넘어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 비로소 해결되기도 한다. 지난 회사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중국과 콜라보를 한 제품 출시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제품에 작지만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넣지 않은 걸 디자이너가 발견했던 것이다. 당시 담당 마케터였던 나에게 와서 말을 해주셨는데, 사실 넘어가도 모를 만한 일이지만 나는 외면하기보단 정면으로 돌파하는 걸 선택했고 혹시 문제가 될지 +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를 다 파악한 후에 부사장님에게 디자이너와 함께 가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결과는 예상할 수 있다시피, 생각보다 덤덤하게 지나갔다. 덤덤하게? 아니, 나는 오히려 그게 나에게 좋은 영향이었다고 믿는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일은 정말이지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좀처럼 적응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에 마모되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가야하는 일이다. 뭐 그렇게 살면서 불편한게 많은지! 오늘의 나는 잠을 안자는 상황이 불편하지만, 잠을 자지 않을 각오로 임하고 있다. 왜냐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아주 큰 숙제를 넘겨줬기 때문이다. 불편해도 참아야하고, 불편해도 할 일은 해야한다. 끊임없이 불편함을 넘고 또 넘고, 또 넘고 또 넘고… 거참, 이거 너무 불편한데?



매거진의 이전글 님아 그 강을 건넜잖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