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다이어리 13
독립을 마음 먹고 예전에 같이 일했던 박우덕 사장님을 찾아간 적 있었다. 이런 저런 결심과 계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가지 인상깊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기왕 나가서 혼자 시작하는 거라면 돈을 꼭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되물었다. 사장님처럼 부자가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사장님은 아니, 그건 네 그릇의 차이지, 라고 답하셨다. 야마자키 료씨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도시의 삶에서 돈은 경쟁적 수단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살고 싶은 삶의 형태를 그리고 그것에 맞춰서 돈을 계산해보라는 거였다. 나의 그릇, 나의 삶, 그걸 돈으로 측정해보라는 이야기. 뭔가 돈만 좇는다는 건 이상하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낭만’이다.
다회용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트래쉬버스터즈에서 일할 때, 생산관리를 하던 분이 그런 얘기를 한 적 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트버에는 낭만이 있어서 좋다고. 그것만큼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쫓기듯이 처절하게 일하면서 대체 어떻게 버티는 걸까, 무슨 희망을 쥐고 있는 걸까, 그런 궁금증이 늘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분의 대답은 내일의 희망이 아니라 오늘의 낭만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낭만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약간 오글거리기도 한다. 마치 석양을 뒤로 한 채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닦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미소짓는 그런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마도 앞으로의 나에게 낭만을 정의하는 일이 중요한 부분이 되지 않을까 예감한다. 지금은 일단 그냥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말하는 ‘낭만적 일’은 돈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노동은 결국 재화로 전환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을 함으로써, 가족을 부양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자본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가치가 돈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버는 일이라는 본질은 그대로 있고, 그 가치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좋다는 것도 인정하고 가는 것이다. 다만 워라밸의 관점에서 라이프와의 밸런스가 무너졌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에 좀 더 몰두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힘들고 지치지만 더 더 더 해야하는 이유,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낭만에 가까운 일이다.
힘들지 않으면 낭만은 오지 않는다. 낭만은 마치 엄청나게 휘몰아친 사건과 시련들이 지나간 뒤에서야 빛을 내는 단어이다. 내가 생각하는 낭만은 한량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생기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사람들, 왜 그렇게까지 해? 라는 말에 그냥, 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무심함 같은 것이다. 물론 자기 삶을 지키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건 반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경우에도 속할 수 있는 말이다. 왜 안해? 그냥, 낭만적이지 않아서.
써놓고 보니 우습지만, 여튼 그런 것이다. 약간은 촌스러워보일 수 있고 어떤 면은 찌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쿨내나는 모습으로 삶을 편집하고 어딘가 일상에 거리감을 둔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삶에 파묻혀서 찌든 내를 풍기며 살 수 밖에 없는 이 도시의 삶에서 꼭 하나 지키며 일하고 싶은게 있다면 그게 낭만인 셈이다. 아, 힘들었다, 라고 말하며 밤샜던 날들을 헤아리며 웃고 곧 두둑해질 지갑을 생각하며 배를 두드리는 일 말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약간 해적같기도 하다. 여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앞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건 그런 거라고. 그게 진짜 어떤 모습이 될지 나를 변하게 만들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