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다이어리 14
시련이 힘든 건, 그 이유가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나한테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다. 보통 어떤 책임이 나에게 온전히 쏟아진다고 느껴질 때, 나는 그걸 시련으로 받아들인다.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바로 타인의 실망을 예감할 때 강렬하게 전해진다.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을 통해 타인이 실망할 것 같다는 직감으로 나는 시련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한다. 실연을 앞둔 시련 같은 걸까. 말장난 같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시련들은 특히 실수를 했을 때 마치 폭우처럼 쏟아진다.
실수가 실망이 되고, 실망은 시련이 되며, 시련은 실연을 예감하게 한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까 뭔가 찝찝했다. 맞는 말이지만 어딘가 어색한 게 있었다. 실망은 타인이 겪는 일인데, 시련의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나는 타인의 실망에 그렇게 민감하며 시련으로까지 느끼는 걸까? 나는 그 타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실수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맞다. 어떤 경우라도 실수는 점점 줄어들어야 하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실수’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부정할 수 없다. 어떤 것이 100% 완벽할 순 없다. 어떤 생산 라인이라도 최소한 100만개에 1개라도 실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사람은 더 불완전한 존재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실수를 줄이기 위한 태도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그 최선이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신뢰 속에서 인정 받고 문제를 해결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실수해도 당당하면 안되고, 같은 실수를 거듭하는 것은 경계해야하는 일이다. 하지만 실수를 한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사실 무리한 요구다.
실수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망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누가 발을 밟으면 실수라고 하더라도 발이 아프다. 아프면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면 타인에게 나도 모르게 감정을 표출하게 된다. 실수로 인한 실망도 마찬가지다. 나에 대한 기대가 배반되었을 때, 그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실망. 나는 거기에 곧잘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끔 커다란 어항 안에 갇힌 채 손을 버둥거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왜냐면, 실수와 실망 모두 내가 궁극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걸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온전하게 컨트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수’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고, ‘실망’은 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컨트롤 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 우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실망에 겁을 먹는 건, 예상치 못하는 사고에 계속해서 예민해질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오히려 남의 실수에는 관대하다. 왜냐면 내가 그 감정이 싫어서, 실망에 마음졸이며 실수를 인정해야하는 그 상황이 싫어서, 타인에게 그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 후배들, 작업자들이 뭔가 크고 작은 실수를 했을 때, 나는 실망하거나 감정을 배출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독이고 함께 빠져들어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너무 뻔뻔하게 굴면 마음이 차갑게 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초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뾰족하게 대하진 않는다. 그냥 차가운 마음으로 돌아설 뿐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다. 타인의 실수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순간, 내 실수가 아닌 일로 (또 다른) 타인의 실망을 감내해야 할 것 같을 때. 어쩔 수 없는 상황 사이에서 시련에 빠지는 것이다.
일찍이 ‘일에 신경은 쓰되, 마음은 쓰지 말라’고 배웠다. 그건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늘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참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일 수록, 실수를 하지 않는 것보다 실수를 잘 수용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 같다. 실수의 비율은 줄어들 지언정, 실수의 절대량은 인생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당연히 늘어난다. 하는 일이 1개에서 10개가 되면, 실수가 1개에서 3개만 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계속 그러다보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열패감시 생기기도 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련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거나 시련을 느낀 후에 도망치지 않고 자꾸 일어서는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일 뿐일 거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적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어떤 감정과 상황들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실망했을 때 감정을 드러내며 타인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마치 타인의 잘못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준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도 꼭 누군가가 잘못해야지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상황과 사건은 늘 종합적인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벌어진다. 타인에게 가시를 세우는 사람은 본인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꼴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도, 가시에 찔렸을 때 아프지 않을 순 없다. 자주 찔려서 익숙해지거나 굳은 살이 배길 순 있지만, 누군가 어디를 찌를지 얼만큼 찌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소한 내가 타인에게 가시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 찌르더라도 그 의도와 상관없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태도와 관계를 마련하는 일뿐이다. ‘고작’이라고 썼다가 지웠지만 사실 고작 그것뿐인게 맞다. 다만 그 ‘고작’ 그 정도의 일이 나의 세계 전부를 지켜내는 힘 중에 하나라는 것만큼은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