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다이어리 23
한해를 정리하는 일이 어떤 의미에선 너무나 인간적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의 경계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고 인간 외에는 아무도 신경 안쓴다는 점에서)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난 몸, 인간이 인간의 일을 하는게 뭐 어때! 라는 마음으로 연말에는 이것저것 정리하는 기분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업무와 학업, 세금 등 여러가지 기준들이 다 경계를 더 굳건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고. 뭐 여튼 그렇다고 대단한 정리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적어본다.
1. 문득 시간을 들여서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이란 책을 읽고나서 들었던 것 같은데, 사실 책의 내용은 괴물이 된 아티스트의 작품을 수용하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에 대한 내용이지만 이상하게 읽고나서 영화를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OTT 플랫폼을 뒤지면서, 마치 배달 플랫폼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처럼 뒤적이는게 아니라 누군가 제대로 잘 만든 영화를 보는 일 말이다. 그렇게 영화를 찾다보면 영화제 수상작, 유명한 감독, 유명한 배우 들 위주로 기준을 세울 수 밖에 없다. 그럼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런 영화들이 자극적인 OTT형 영화의 기획에 밀려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를 찾아서 보았고 감동 받았다. 이렇게 멋진 영화가 있는데, 나는 유명 배우가 나오고 유명 감독이 마음껏 돈을 쓰며 만든 유명한 액션 영화 목록만 찾고 있었던 셈이다. 보고싶은 영화의 목록, 이른바 장바구니 목록을 다시 채웠다. 폴 토마스 앤더슨,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하마구치 류스케,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틴 스코세이지, 소피아 코폴라 등 좋아하는 감독들 영화로. 물론, OTT 플랫폼 안에서.
2. 최근 오피스를 구했다. 새로 구했다고 쓰려다가 어차피 없었으니까 ‘새로’라는 말을 쓰는 건 틀린 것 같아서 지웠다. 원래는 집에서 했다. 그런데 자꾸 편리함에 안주하는 것 같아서, 너무 편해서, 나가기로 했다. 사무실이 필요해? 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 사실 필요한건 아니야, 라는 말이 솔직한 마음이다.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 이게 내가 찾은 대답이다. 편리함은 모래지옥 같아서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나는 특히 밖에 나가는 것과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한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더라도 나갈 때의 방식과 나가지 않을 때의 방식이 뭔가 다른 것이다. 로션을 바르거나 향수를 뿌리거나 하는 등의 미세한 차이가 있다. 집에 있으면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생각보다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바로 나간다거나, 누굴 만난다거나, 나간김에 밖에서 뭔가를 해결하는 등의 일 말이다. 물론 요새 인터넷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확실히 있다. 세상은 실체를 가지고 오프라인에 구현되어 있으니까. 이번주 토요일이 계약이고 1월에 들어간다. 요새 잠들기 전 머릿속에 늘 사무 공간을 시뮬레이션 하느라 잠을 설친다.
3. 부동산을 도는 일은 늘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한계까지 몰아부친다는 점에서 그렇고, 내가 가진 자본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 지 명확하게 보여지기 떄문이기도 하며, 또 여기까지인가 하고 포기할 때쯤에 꼭 새로운 기회가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번에도 나름의 타협을 하며 찾은 곳으로 결정하려던 찰나,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이 마음에 들어서 가게 되었다. 인생, 왜 그런 걸까? 왜 꼭 노력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마음 졸이지 않으면 좋은 기회가 떠오르지 않는 걸까? 바로 그냥 눈 앞에 나타나주면 안되는 걸까? 얄궂은 일이다.
4. 세무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달 매출이 기존에 비해서 높고 매입은 그에 미치지 못해서 내년도 세금이 걱정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다 약간의 편법 같아서 사실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았다. (세무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늘 친절하고 꼼꼼하게 처리해주셔서 믿고 맡기고 있다.) 그래서 혹시 이대로 가면 얼마나 부담해야하는지를 물었다. 어느정도 계산치를 말씀해주셨고, 나는 사실 어느 정도는 낼 생각은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조건 세금을 덜 내는 것만 좋은 건 아니고, 내 상황과 앞날을 생각해서 적당히, 그리고 정당하게 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신경써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래서 이래저래 웃으며 마무리를 했다. 내 나름의 2024 스웩이 아니었나 싶다.
5. 올해를 생각하면 유독 아득하다. 매년 그렇지만 2024는 묘했다. 보통 새해가 되면 숫자를 잘못쓰는 건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2023년 새해에 2022년으로 나도 모르게 적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2024는 달랐다. 자꾸 2025년으로 적었다. 2024를 마치 건너뛰는 것처럼, 2025가 더 앞에 다가와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되게 묘한 기분이다. 새해가 어떤 덩어리가 있는 물체로 떡하니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관념적인 것인데 자꾸 그것을 건너뛴 곳에 내가 가 있는 느낌이란. 그런 2025가 이제 정말 코 앞이다. 가끔 겁이 나고, 대부분 아무 생각 없다. 사실, 늘 그렇듯이.
6. 최근에 처음을 장염을 앓았다. 덕분에 남은 술약속들을 거의 취소했다. 장염인지 어떻게 알았냐면, 장염일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상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사실 병원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장염이었다. 밤새 화장실을 들낙날락거렸고 열도 나고 몸에 힘도 없었다. 먹는 족족… 그만 말하겠다. 여튼 가끔 배가 아픈 경우는 있었지만 이런 건 처음이라, 아 이건 그냥 아픈게 아니구나 했다. 다들 장염에 처음 걸렸다는 것도 신기하네요, 하기도 했고 또 다들 어느정도 장염을 겪어본 경험이 있다는게 내 입장에선 더 신기했다. 한번 겪고나니 무서워서 갑자기 건강 염려증이 생겼다. 한동안 안챙겨먹던 영양제도 챙겨먹고 있고 집에서 가볍게 운동도 하고 바빠서 못하던 러닝도 조금씩 시작했다. 아프지 말아야 하지만, 아파야지만 깨닫게 되는 게 있다는 건 참 슬프고 멍청한 일이다. 어쩌면 멍청해서 슬픈지도 모른다. 슬퍼서 멍청할리는 없으니까.
7. 멍청하다는 말에 이어서 하자면, 사실 친절함과 배려는 지능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건 어떤 여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똑똑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적인 배려나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사람은 그냥 멍청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선 사실 그런 사람을 멍청하다기보다는 부족한 사람으로 본다. (이건 내가 봤던 몇몇의 댓글 반응을 보고 일반화 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사람들은 친구도 없을거야, 돈도 못벌거야, 회사도 안다니니까 집에서 저런 것만 하는 거지, 이런 식이다. 굉장히 사회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생각 안에서 못난 사람 취급을 한다. 아니다, 그들은 못난 것 이전에 못된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취급하고 나면, 사실 그들이 번듯한 직장을 다닌다거나 좋은 대학을 나왔거나 하는 식으로 밝혀졌을 때 미묘한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면 무례해도 되나? 좋은 대학을 나오면 싸가지 없어도 되나? 못된 건, 멍청함이다. 멍청해도 노력하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부모를 잘 만나 운이 좋으면 좋은 회사까지 갈 수도 있고 검사 판사도 의사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멍청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 멍청해지진 말아야 한다.
8. 멍청하지 않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자기 자신 조차 컨트롤하기 힘든 것인지. 육체는 한계가 있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인지. 나는 중심이며 동시에 변두리이고, 시작이며 끝이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9. 이런 저런 생각들이 뒤엉키고,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내가 되었다.
곧 2025가 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