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으로써 채워진다.
'백(白)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색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 속에 존재하는 감각의 자원을 밝혀내는 시도이다. 즉, 간결함과 섬세함을 낳는 미의식의 원점을 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 머리말 中
하라 켄야는 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로 더 잘 알려진 디자이너다. 무인양품의 제품들은 대부분 백색이다. 그 형태 또한 필요한 기능 이외에 특별한 디자인을 더하지 않는다. 최첨단의 기기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수많은 버튼과 화려한 디자인을 뽐내는 여타 제품들과 달리 무인양품의 제품들은 하나같이 '조선의 백자'처럼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는 무인양품이라는 기업의 근본적인 브랜드이자 철학이다. 하라 켄야는 이것을 '공(空, emptiness)'이라고 설명한다. <백白>은 하라 켄야가 줄 곳 이야기하는 '공'의 개념과 통한다. '백'은 새하얀 도화지와 같다. 색이 존재하지 않으나 우리는 그것을 '무無'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백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비어있음'을 의미하는 '공백'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채우려는 인간의 본성은 곧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능력을 발현하도록 부추겼다. 수많은 백지 위에서 인간의 미의식은 꽃을 피웠다.
'공백'은 단지 간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백'은 'Simple'과 다른 위치에 서있다. 'Simple'은 필요 없는 것을 지워냄으로써 핵심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의 점과 같다. 아주 간결하면서 그 자체에 모든 것을 담아낸 단 하나의 점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벗어난 그것 자체로 충분한 존재가 된다. 'Simple'은 강한 존재감의 표현이다. 그러나 공백은 '빈 공간'을 만든다. 보는 이가 직접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물러남을 추구한다. 누구나 빈 공간에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백은 커뮤니케이션을 만들고 '가능성'을 내포한다. 비어있지만 생동한다. 'Simple'이 말하기라면 '공백'은 듣기다. 'Simple'이 앞으로 나아감이라면 '공백'은 물러남이다.
<백>은 하라 켄야 특유의 '백의 미학'을 담은 책이다. 하라 켄야의 저서는 여러 권이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 <내일의 디자인> 등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디자이너보다 철학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게 된다. 어쩌면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시각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을 탐구하는 철학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철학이 바탕이 되어있을 때 비로소 누구나 공감하는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무인양품이 일본 특유의 미학과 동양의 철학적 개념을 파고들어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백'이 가진 순수함, 깨끗함을 넘어서 그 속의 생동하는 어떤 흐름을 느끼게 된 것 같아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