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여자의 이야기, 그 시작
1.
그래서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5초.
우리가 만나서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은지 5초.
남자는 훤칠한 키에 반듯한 인상, 푸른 셔츠에 세련된 니트를 입고 고급 브랜드 시계를 찼다. 탁자 밑, 긴 다리의 끝에 검은 정장 구두로 시선이 갔다. 남자는 온몸으로 나는 잘난 놈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구하는 중이에요.
딱히 숨기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커피도 나오기 전에,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도 전에 웃으면서 나한테 처음 건넨 질문이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였다. 소개팅에 너무 오랜만에 나온 것 같다. 이름을 묻기도 전에 직업이 궁금한 것이 트렌드가 된 걸 보면.
남자는 '아, 그러시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작년에 우리 은행에 합격한 1년 차 행원이며, 집은 압구정동에 있다고 소개를 한다. 이미 소개한 친구를 통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요,라고 그가 덧붙였다.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나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가 자랑스럽게 말한 그 정보들이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깨닫고 있었던 단 한 가지는 소개팅이 시작된지 5초 만에 내 기분이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뿐.
괜찮은 놈이야, 한번 만나봐.
친구가 카톡에서 뱉은 한마디였다. 언제부터 괜찮은 사람의 기준이 잘생기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객관적으로 말해본다면 인물 준수한 은행원은 여자가 시집 가고 싶은 남자 상위권에 속한다. 내 분수 모르고 스펙 좋은 남자들과의 막연한 로망이 있었던 20대 초반의 나라면 어쩌면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럼요.'라며 덥석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30대를 바라보는 나는 고개를 흔든다.
5초.
우리 눈이 처음 만난 상대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
우리 은행의 임원들이 신입 행원을 판단하는 데 걸렸던 시간과 동일한 시간.
우리는 5초 동안 같은 상대를 평가했고, 다른 결론을 내렸다.
2.
넌 언제 취업할 건데?
라고 엄마가 등짝을 후려칠 때마다, 더 이불 속에 몸을 칭칭 감는 건 엄마의 구타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내가 한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소위 넘사벽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스펙이 없어서 스펙을 쌓기 위해 밑바닥부터 고군분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낮지도, 그렇다고 상위 1% 안에 드는 높은 실력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들이 있다.
그게 바로 나다.
여기에서 밝히는 My Spec
1. 영어권 해외 유학 5년
2. 일본 교환학생 6개월
3. 봉사 활동 3개 (해외 봉사 1, 국내 봉사 2)
4. 토익 900, 토익스피킹 7 (영어 회화 상급, 일본어 상급)
5. 성적 장학금 및 교내 시상 다수
6. 아르바이트 영어 교사 경험 다수
7. 대외 활동 다수
8. 서울권 4년제 A등급 대학
9. 학점 4.1/4.5 인문계 상경계 복전 중
10. 자격증 없음, 공모전 경력 없음, 인턴 경력 없음.
이게 왜 어중간한 스펙이냐고 욕할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 같다. 또는 어중간한 스펙 맞네,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필자가 욕먹을 걸 각오하고 첫 장부터 스펙을 모두 밝히는 이유는 내 나이가 이렇게 되는 동안 아직도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투자를 한 게 있잖아요.
자녀를 해외로 유학시킨 부모님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다. 남부럽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공기업 정도에 다니는 가장이 있다면, 생활 상의 약간의 손실을 무릅쓰고 한 자녀를 고등학교부터 해외의 대학까지 유학시킬 수 있다. 이것을 중산층의 부모들은 '투자'라고 부른다.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거는 기대는 당연지사 크겠지만 '투자'를 크게 한 자식에 대한 기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도 있고, 해외 유학까지 시킨 잘난 아들, 딸들인데 한국의 대기업 정도는 취직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작 현실을 깨닫는 건 부모님이 아니라 그 잘난 아들, 딸들이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따라라라.
"언니 정도면 진짜 괜찮아요. 진짜 짱이에요."
사람들은 진짜라고 엄지를 치켜든다. 4년 전의 나도 내가 '진짜' 괜찮은 줄 알았다. 나만한 스펙이 없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요,라고 모두가 말한다. 암울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세상에 나보다 더 궁지에 몰린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위안이 되기보다는 겁이 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독기를 품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네가 자소서가 광탈되는 기분을 아냐?
2년 전 겨울인가, 같이 술을 마셨던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국문과인데도 언어에 취약해서 '광탈'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내가 얼 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선배는 또 한번 맥주에 소주를 들이 붓고 있었다. 광탈은 광속 탈락이라고 했다. 아직 취업 시즌이 아니었으므로 잘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선배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매번 장학금을 탔고, 교수님에게도 싹싹했고 성실했다. 성격도 활발해서 봉사활동, 공모전에서도 매번 입상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는 학교를 졸업 후 고시원에 등록했다. 공부를 더해서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다고 했다. 면접 준비를 하려고 스터디도 스스로 홍보해서 만들었다. 그런데 이놈의 대기업이 선배에게 면접의 기회를 안 준다고 했다.
5초.
인사과의 직원들이 자소서를 평가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란다.
설마 정말 5초만 읽었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선배가 TV를 보며 박장대소했다. '야, 쟤 웃기지 않냐. 완전 웃겨.' 너무 웃어서 그런 건지 취기 때문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선배가 아예 식탁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억눌린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 가운데 '저 자식 웃겨, 진짜 웃기는 새끼야, 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어.'라는 중얼거림이 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 개그맨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는지,
취업난에 시달리던 괴로운 청춘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아직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새파란 후배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날 선배는 분명 독기를 품고 있었다.
3.
사랑만큼은, 사람을 사랑할 때만큼은
사람을 보아주면 좋겠다.
고마워요, 데려다 주셔서.
어디에서 끌고 온 건지 알 수가 없는 외제차로 나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 준 남자가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핸들을 잡고 있는 남자의 왼팔에 시계가 깜빡이더니 '계장님'이라고 뜬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시계에 뜬 글씨를 자세히 보여주며 '은행이 일이 많아요. 토요일 일요일이라고 다 쉬는 거 아니에요. 힘들겠죠?' 란다. 나는 네,라고 웃었다.
그것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인사를 나누고, 내가 차 문을 열고 차 문을 다시 닫고, 그는 계장님과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멀어져갔다.
[야, 너 차인 것 같음요]
코미디가 따로 없다. 샤워를 하고 엄마에게 취직은 언제 할 거냐며 등짝을 두드려 맞고, 다시 침대에 돌돌 몸을 말아 누웠더니 온 카톡이다. 사진에서는 지 이상형이라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영 별로란다. 특히 20대 후반인데 아직까지 직업이 없다는 점이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적나라한 피드백은 또 처음이라 기가 막혀서 답장을 어떻게 보내야 이런 놈을 소개시켜 준 친구도 물 먹이고 그 놈도 물 먹일 수 있을까 살짝 고민했는데, 생각해보니 또 완전 틀린 말은 아니라서 화가 슬며시 가라 앉는다.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건지, 아니면 자소서 광탈에 자존감이 낮아져 난 그냥 그 정도인가 보다,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압구정동에 사는 신입 은행원에게 미래의 비전이 없다는 이유로 차였다. 직업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 우리가 첫 인사를 나눈 5초 후였음으로, 난 5초 만에 차였단 말이 된다. 나도 그 사람을 완전 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차 잘된 일이지만 씁쓸할 마음은 감출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취업 전쟁의 시대에서 사랑도 취업을 했느냐 못했느냐로 갈려지는 건 분명 슬픈 일이다.
-C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