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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Oct 13. 2016

분황사와 황룡사지, 젊은 날의 신라

후발주자 신라


 지난 편에서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신뢰하는 편이다, 대체적으로. 그렇지만 한 가지 믿을 수가 없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신라가 삼국 중에 가장 먼저 건국했다는 것이다. 벌써 나라 이름에서 후발주자라는 것이 티가 나지 않나. 새로울 신(新), 벌일 라(羅), 신라.


  신라는 후진국이었다. 오죽했으면 광개토대왕에게 자기네 땅에 들어온 가야와 왜를 물리쳐달라고 군대 파견을 요청했을까. 그런  역사기록뿐만 아니라 유적, 유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나 장수왕릉 등에서 보이는 웅혼한 기상,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세련된 백제의 유물들에서 보이는 섬세한 미감들을 당대의 신라 유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물론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금은제 장신구들은 예외로 하자). 5세기 신라 토기에 붙어있는 토우를 보시라. 좋게 이야기해서 원초적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손으로 대강 만들어 놓은  흙인형일뿐이다. 한마디로 촌스럽다. 


원초적 생명의 약동 또는 조악함


  그런 신라가 결국 고구려, 백제를 누르고 일통삼한을 이뤄낸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언제부터 신라는 제대로 힘을 키워 고구려, 백제라는 강대국들을 따라잡기 시작했을까. 


  역사적으로는 5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립간 시절 왕권이 안정되어 국가의 기틀을 쌓기 시작했고, 6세기 법흥왕, 진흥왕 때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를 완성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힘을 키운다. 그리고 7세기 후반 김춘추, 김유신 등의 뛰어난 활약으로 결국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뛰어나서일까. 우리는 항상 진평왕, 선덕여왕 시기를 건너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법흥왕과 진흥왕 때의 눈부신 발전이 무열왕, 문무왕 때까지 이어지기 위해 안으로 내실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기가 바로 진평왕과 선덕여왕 재위 시절이었으며, 사실 지금 남아있는 고신라 유적, 유물은 거의 다  그때의 것이다. 분황사, 황룡사지, 첨성대... 그러므로 그 약동하는 신라의 젊은 날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분황사와 황룡사지로 가야 한다. 




지성의 전당  


먼저 분황사.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시절에 세워진 절로써 자장, 원효와 같은 당대의 지성들이 주석했던 절이다. 지금은 조선시대 지어진 약사전만 남아 많이 쇠락했지만 분황사 모전석탑이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분황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원래는 9층(또는 7층)이었으나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었고, 일제시대에 수리 보수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모전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 모는 본뜨다, 닮았다 할 때의 '모(模)', 전은 벽돌 '전(塼)'. 즉 돌을 이용해서 벽돌로 만든 전탑을 흉내 내서 만든 탑이라는 뜻이다. 여전히 중국의 탑을 모방하는 수준이지만 법흥왕 때 공인된 불교가 지배계급에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도 이제는 이 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예전에 우리가 미국을 따라했듯이


  경내에는 선덕여왕 시대의 우물, 삼룡변어정도 있어 눈길을 끈다.  바깥은 팔각형, 안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불교에서 꼭 지켜야할 올바른 일 8가지, 팔정도와 원불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다. 견고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나저나 얼마 전까지만해도 실제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나.


단단하다

 


 

서라벌의 배꼽


  그렇지만 당시의 욱일승천하던 신라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바로 황룡사지라 하겠다.  황룡사는 발굴 조사 결과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로 총 2만여 평이나 되는 신라 최대, 아니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가람배치는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금당 좌우에 각각 동서 금당이 있는 일탑삼금당 양식이다(통일신라 들어서면 이런 가람배치가 쌍탑일금당 양식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감은사지, 사천왕사지, 불국사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황룡사가 창건된 것은 진흥왕 14년(553). 17년 만에 1차 공사 끝나고 담장이 완성되었으며, 순차적으로 경내의 주요 건물, 금동장륙상 등이 만들어졌다. 이후 선덕여왕 14년(645)에 9층 목탑이 완공되면서 4대왕 93년 간이라는 긴 세월의 대역사가 마무리된다. 


  여기서 잠깐 황룡사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 한 가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그 자리에서 황룡이 나와 절을 짓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용? 황당하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우리도 연못이나 호수에서 큰 물고기가 잡히면 예사롭지 않게 여기지 않나. 아마도 당시에도 이곳에서 커다란 물고기나 평소에 보지 못하던 생물이 잡히고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용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영국 네스호나 백두산 천지에 산다는 괴수도 그런 이야기의 현대판 버전이 아닐까)


  그런데 실제로 발굴조사를 해 본 결과 이 곳은 원래 늪지였으며 땅을 다지기 위해 판축을 한 것이 발견되었다. 판축이란 판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토사를 교대로 펴서 마치 시루떡같이 쌓아 지반을 다지는 기법을 말한다. 아주 고급 기술인데 주로 성벽을 쌓을 때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삼국유사 내용의 정확성이 한번 더 입증되게 된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자. 남문터에 서서 보면 중문터, 목탑터, 금당터 등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확  인되는데 그 규모가 실로 장대하다. 가끔 중국의 자금성이나 진시황릉을 보고 우리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데 꼭 시간 내서 황룡사지에 한번 와 보시라.


광활하다

  

  목탑터에 올랐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선덕여왕 12년(643)에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착공되어 2년 뒤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의 초청으로 온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만들었는데 이처럼 당시의 신라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고급 기술을 배우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그래서  적국의 기술자를 초청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미터로 바닥면적만 150평, 높이는 대략 225척(80미터)로 요즘으로 치면 20층 건물과 맞먹는 높이의 거탑이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아홉 개 주변국들로부터 시달림을 막기 위험이었다고 한다.


초석만 64개!

  

  그리고 금당터. 그 유명한 장륙존상 대좌. 높이가 일장육척(약 4.8미터)이나 되는 거대한 석가여래삼존상인 금동삼존장륙상이 서있던 자리이다. 이처럼 황룡사는 모든 것이 다 크다. The bigger, the better! 


어떻게 돌이 사람 마음을 이리도 흔들어대지...


  오랫동안 대좌의 갈라진 틈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델포이의 신탁이 떠올랐다. 그리스인들에게 델포이는  하늘과 땅, 지하 세계가 한 곳에서 만나는 우주의 축이었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델포이를 '지구의 배꼽, 옴팔로스'라고 믿었다. 신라의 중심, 서라벌의 배꼽은 바로 이 곳이 아니었을까. 저 갈라진 틈에 귀를 갖다 대면 델포이의 신탁과 같이 천오백여 년 전 신라시대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들려올  듯하다.  


Tell me the secret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새로운 기술 도입 등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가는 신라인들의 유연성과 이를 토대로 거대한 석탑과 목탑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그들의 문화적 역량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황룡사와 같은 거찰을 그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완성시킬 수 있었던 장기적 비전이었다.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권만 바뀌면 정책이 이리 저리 요동치고,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강을 파헤치고 교과서를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려는 현실과 비교하니 왠지 씁쓸하다. 그러한 뚝심과 끈기, 그리고 문화적 자신감들이 모아졌기에 한반도 동쪽 끝 시골 깡촌에서 시작된 신라가 주변의 강대국을 물리치고 일통삼한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황룡사를 제대로 보기 위한 팁 하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황룡사지에 올 때 분황사를 먼저 들른다. 황룡사지 가는 버스도 없고, 주차를 하려고 해도 마땅치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황사 앞 주차장에 차를 댄 다음, 분황사를 보고 자연스럽게 황룡사지를 둘러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동선을 짜면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발굴 조감도를 보시라. 



  문제가 뭔지 아시겠는지. 분황사 들렀다가 황룡사로 갈 경우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이 어마어마한 절을 둘러보는데 좀도둑처럼 뒷문으로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러니 잘 정리된 주춧돌들이 보이더라도 꾹 참고 지나쳐서 남문지까지 걸어가시라. 그리고는 중문지 지나서 목탑지, 금당지에 올라서 주위를 둘러보시라.  그래야만 절에 들어가는 기분도 들고 황룡사의 그 장대한 규모도 제대로 느낄 수 있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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