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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Jan 11. 2017

낭산 기슭에서 오늘을 생각하다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

 경주시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알 수 있다. 산이 참 많다는 것을. 신라인들의 불국토였던 남산,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태종무열왕릉을 품고 있는 단석산, 화랑들의 수련터였던 선도산, 그리고 순교자 이차돈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소금강산 등등. 이런 산들이 형제처럼 어깨를 맞대고 경주평야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경주는 분지다. 그리고 그 경주 분지의 중심에도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으니 바로 낭산이다.


  낭산(狼山). 승냥이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해서 그리 불려지게 되었는데,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해발 1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봉우리(?)가 남북으로 세 개 연결되어 있는데 차라리 언덕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그렇게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낭산이지만 이 곳을 생각하는 신라인들의 마음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삼국사기> 실성 이사금 12년 기록을 보자. 


  가을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멀리서 보면 누각같이 생겼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필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복 받은 땅이로다"라고 하여, 이후로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출처 : 김부식(이강래 옮김), 삼국사기Ⅰ, 한길사, 1998, 106쪽


  이처럼 신라인들은 낭산을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으로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그래서인지 낭산 자락에도 유적들이 많다. 능지탑, 중생사,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 신문왕릉 등이 대표적인 곳인데 대부분 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선덕여왕릉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관광지는 없지만, 그리 번다하지 않아 조용히 옛 신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처음으로 가 볼 곳은 능지탑과 중생사. 능지탑은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원래 5층 정도 규모의 탑이었다고 한다. 무너져버린 탑을 남아있는 석재들을 이용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능지탑 뒤편으로는 중생사라는 절이 있고 절 한편에 마애삼존불이 있다. 근데 마모가 워낙 심해 잘 보이지 않는다. 좌우 협시불은 지장상이라는데 거의 보이지 않고 특이하게 모자를 쓰고 있다는 본존불도 자세히 봐야 확인이 된다.





  다음으로 갈 곳은 선덕여왕릉. 이 곳도 원래는 낭산의 다른 유적들처럼 한적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선덕여왕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이후부터는 낭산뿐만 아니라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가 되었다. 


  선덕여왕.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성골에 의한 왕위계승이 확고하게 지켜지던 때라 맏딸인 그녀가 왕위를 이어 받게 된다. 신라 최초의 여왕 탄생(632년).


  간략하게 선덕여왕이 낭산에 묻히게 된 사연을 살펴보자. 그녀는 자신의 치세 말년 죽음을 예감하고 신하들에게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어리둥절해진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알려준다. 이후 여왕이 죽고 명에 따라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 후 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가 지어지게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은 사천왕의 하늘 위에 존재하는 곳이니 여왕의 말이 맞아떨이진 셈이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으로 당태종이 보낸 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맞힌 일,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백제의 적병이 공격할 것을 알아차린 일과 함께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언급된다. 


도리천에 묻힌 여왕


  선덕여왕 하면 이처럼 지혜롭고 인자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떠올라 그녀가 다스리던 시절도 평화로왔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전혀 그렇지 않다. 백제와 고구려가 끊임없이 국경을 압박해 들어오는 전란의 시대였다. 이에 여왕은 백제를 견제하고자 춘추를 고구려에 보내고, 여러 차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비굴할 정도로 도움을 요청했다. 국내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켜 겨우 진압했으나, 이때 받은 충격으로 여왕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지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여왕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춘추와 유신 등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 백제의 위협을 물리쳤으며, 분황사, 황룡사, 첨성대 등을 건설하고 내치에 힘써 아버지 진평왕에 이어 일통삼한의 기초를 쌓아나갔다. 부럽다. 헌정사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던 이가 지난 4년 동안 피부미용을 받은 것 이외에는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요즘에는 더더욱.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오면 보이는 곳이 바로 사천왕사지. 유명세로는 선덕여왕릉에 뒤떨어지지만 낭산의 간판은 뭐니 뭐니 해도 이 곳이다. 사천왕사는 부처님의 힘으로 당을 막아내고자 하는 염원으로 문무왕 11년(671)에 짓기 시작하여 19년(679)에 완공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대국. 그런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쳤지만, 당나라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라의 힘을 한 군데로 모아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런 상징적인 건축물도 필요했으리라.


절은 사라지고 남은 건 당간지주 뿐


  사천왕사지는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다. 신라의 가람배치는 원래 분황사나 황룡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탑삼금당식이었으나, 통일 전후한 시기에 쌍탑일금당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 최초의 예가 바로 사천왕사이다. 사천왕사에는 목탑이 있었지만 곧 신라 특유의 삼층석탑으로 교체되고 이런 가람배치가 통일신라시대의 주류적 양식이 된다.


  그런 사천왕사지만 현재의 모습은 암울하다. 일제시대 건설된 동해남부선은 정확히 절터를 반으로 가르며 지나가고,  앞으로 나있는 7번 국도는 울산과 포항을 오가는 화물차량들의 굉음으로 언제나 번다하다. 그래서 사천왕사지에는 오래 머무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다만 당간지주 옆 수풀에 버려진 잘 생긴 돌거북을 보면서 심란한 마음을 달랠 뿐. 





  자, 이제 길 건너 편에 있는 망덕사지로 가자.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는 함께 둘러보시길 권한다. 그래야만 격동기였던 7~8세기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두 절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망덕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사천왕사지에서 길을 건너 동남산 화랑교육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남천까지 내려와 왼쪽에 있는 둑길을 걷다 보니 '장사 벌지지'라고 쓰여있는 입석이 보인다. 아, 이곳이 김제상과 그의 부인의 애절한 사연이 서려있는 곳이었구나! 


  다 아시듯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김제상을 만나기 위해 부인은 사력을 다해 따라갔으나 실패한다. 이에 절망한 부인은 망덕사 문 남쪽 모래 위에 길게 누워 통곡을 한다. 그래서 이곳을 길 장, 모래 사를 써서 '장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같이 간 이들이 드러누운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했으나 뻗친 부인의 다리를 들 수가 없었단다. 그만큼 부인의 슬픔이 컸던 거겠지. 그래서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적었는데 그것이 바로 '벌지지'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깊은 슬픔


  망덕사 남쪽이 장사였으니 이 입석 북쪽에 망덕사지가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들어 북쪽을 보니 입석 뒤로 소나무 숲 보이고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한편에 아담한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서 있다.


겨우 찾았다!


  망덕사가 지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는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힘겨운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의 공력까지 빌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건설했고, 그 덕분인지 전세가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당 고종이 사실 확인차 사신을 보내게 되는데, 신라는 그에게 사천왕사를 보이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사천왕사지 건너편에 절을 하나 새로 짓는다. 파견된 사신에게는 온갖 뇌물을 먹이고 새로 지어진 절을 보여주며 이 절은 당나라 황실을 위한 절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의 이름이 망덕사이다.  


  절의 가람 배치는 사천왕사와 같이 쌍탑일금당양식.  아래 첫 번째 사진이 금당터. 그 아래 왼쪽 사진이 서탑터. 잘 보이진 않지만 소나무 숲에 쌓여 있다. 오른쪽 사진은 동탑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13층의 목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꽤나 큰 규모였던 것 같다. 




  서탑터에 앉아 사과 한알 깨 먹으며 금당지와 그 너머 사천왕사지를 바라본다. 그깟 절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그걸 숨기기 위해 가짜 사천왕사를 만들고 사신에게 뇌물까지 받쳤을까.  7세기 후반 세계 최강의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약소국의 설움 같은 것이 느껴져 마음이 짠하다. 자연스럽게 부산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미, 중 사이에서 일관성없이 오락가락하는 모습 등 강대국에 치여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떠오른다. 세월이 그리도 오래 지났지만 별로 변한 게 없구나. 


힘없는 자의 슬픔




  마지막으로 가 볼 곳은 신문왕릉. 능은 왕릉답게 아주 견고하게 지었다.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봉분 주위를 5단의 돌로 석축을 쌓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총 44개의 호석을 설치하였다. 특히나 호석들이 인상적인데 참으로 견고해 보여 웬만한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듯하다.


왕릉과 소나무의 조화가 예술이구만

  

  신문왕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문무왕의 첫째 아들로서 감은사를 창건한 왕이 아닌가. 그 위대한 탑을 만든 분이니 어찌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왕으로서 업적 또한 상당하다. 왕권을 강화하고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국학을 설립하고 당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는 등 통일 후 나라를 안정시켜 신라 전성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대구인 달구별로의 천도는 실패했다. 그만큼 기득권을 가진 경주 귀족세력의 반대가 심했던 탓이겠지. 몇 년 전 행정수도를 이전하려던 시도를 헌재가 '관습헌법상 수도는 서울'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무산시켰던 것이 생각나 씁쓸했다. 어째 낭산 기슭에서는 자꾸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되는구만.


 



  대부분의 경우 경주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봄이라고 생각하시겠지. 나도 동의한다. 벚꽃 흩날리는 경주는 말 그대로 별유천지비인간! 그렇지만 정말 제대로 경주를 볼 수 있는 계절은 언제일까? 단언컨대 겨울이다. 경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불국사나 석굴암, 안압지처럼 화려한 유적이라 착각하기 쉬운데, 경주의 유적지들 대부분은 무너진 절터이거나 폐기된 건물지이다(사실 안압지도 폐기된 동궁터에 건물만 몇 개 복원해 놓은 거지, 뭐). 그런 유적들은 화려한 봄이나 울울창창한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추수가 끝난 후 서리가 내리고 나무들이 나신을 드러낼 때가 돼서야 조심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망덕사지를 가 보시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책이나 안내지도를 보면 사천왕사지 길 건너에 있다고 나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제대로 된 길이 없어 걍 논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나마 겨울엔 가을걷이가 다 끝났으니 지나 갈 수야 있지 봄, 여름에는 엄무도 못 낼 일이다. 게다가 농번기 때는 절터에 풀도 많이 자라 건물지가 제대로 보이기나 하려나. 그러니 경주의 숨겨진 속살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겨울에 오시는 걸 강력 추천한다. 그리고 경주는 어차피 폐허의 도시인데 겨울과 제일 잘 어울리지 않겠나.  


저 너머 소나무 숲 쪽에 있는 망덕사지에 가고 싶은데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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