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요리 하나
텃밭농사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일어나자마자 그 날의 날씨와 기온을 확인하는 것. 5평도 안되는 텃밭을 일구는 것이지만 농사는 농사니까. 그러다보니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같은 거창한 용어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6년 전과 비교해보면 너무 더워졌다. 농사 시작하고 몇 해 동안은 6월이 되어야 땀이 났는데, 이젠 5월 중순만 되면 숨이 턱턱 막혀 오전 11시 넘으면 일하기 무섭다.
그러다 보니 작물들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전에 장마 전까지 상추나 쌈채소를 먹었는데, 이젠 5월 중 하순이면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모종들을 심는 시기도 훨씬 앞당겨졌고. 그래서 농림부에서는 동남아에서 기르는 작물을 심어보라고 권장하기도 한다네.
그렇지만 봄농사 지으면서 날씨가 변한 걸 가장 심하게 느끼게 하는 건 바로 시금치다. 4월 초에 씨부리고 싹나서 5월초에 한 두 번 솎아 먹으면 바로 잎이 뾰족해진다. 끝났다는 뜻이다. 이러니 몇 년 전부터는 봄에 시금치를 잘 안 심게 된다.
그렇다고 가을에 심기도 마땅찮다. 많은 분들이 가을 농사는 날씨 선선해지면 시작한다고 생각하시기 쉬운데 천만의 말씀. 무, 배추는 처서 전후에 파종하거나 모종심는데 이게 8월 15일 전후다. 일년 중 젤로 더울 때 일해야 한다는 말씀. 한나절 삽질하고 나면 혀가 쑥 빠질만큼 고되다. 그래도 이 때 시작해야 김장철에 제대로 된 무, 배추를 수확할 수 있다.
시금치도 비슷한 시기에 씨뿌리는데 문제는 너무 더워 싹이 안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9월 넘어 심으면 제대로 자라서 먹을 때쯤되면 서리내린다. 이런...
그래서 작년에 와이프는 아예 텃밭정리한 후 11월초에 시금치를 심었다. 남쪽에선 노지에 키운다지만 대전에서는 얼어죽을 것 같아 바로 비닐을 덮어줬다. 12월 되니 싹이 나기 시작해 제법 잘 자랐다. 얼마 전, 아내가 회사분들과 비닐을 치우니 기특하게도 많이 컸단다. 솎아서 가져왔다. 앙증맞고 귀엽다. 흐르는 물에 씻어 생으로 먹어봤다. 연하고 달다.
된장국을 끓이기로 했다. 냉동실에 있던 황태머리 육수 해동시켜 된장넣고 끓였다. 여기가 포인트인데 얼마 정도의 물에 얼마 정도의 된장을 넣을까가 관건. 그런데 이건 정말 뭐라 말하기가 애매하다. 각자가 집에 가지고 있는 된장의 종류가 다 다르고 취향도 다 다르니까. 난 물 1000cc 정도에 집된장 한숟가락, 시판용 된장 한 숟가락씩 푹 떠서 넣는다. 그럼 너무 짜지 않고 간이 딱 좋다.
설날에 장모님이 주신 건새우도 있어 좀 넣었다. 웬지 잘 어울릴 듯 하다. 한 5분 정도 끓이다가 시금치 한 움큼 넣었다. 너무 보드라와 한소끔만 끓였다.
푸른색 야채라면 질색을 하는 우리집 딸도 된장국 안에 들어있는 시금치는 참 좋아한다. 부드럽단다. 그 작은 손으로 국물이랑 시금치 건져먹는 모습 보면 대견하다. 흐뭇한 마음으로 같이 한 술 떴다. 시금치를 입에 넣었더니 씹을 것도 없다. 스르륵 사라지면서 시금치 특유의 단맛이 퍼진다. 새우 특유의 감칠맛도 시금치랑 잘 어울리고.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맛. 먼 여행 떠났다가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맛. 어릴 땐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이 들수록 된장국이 좋아진다. DNA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맛이랄까. 올 겨울엔 시금치넣고 된장국 자주 끓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