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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잇나잇 Mar 22. 2020

화장실 청소에 대한 단상

 청소를 하다 찾아낸 내 존재감에 대하여

 결혼한 지 1달 차 새내기 신혼부부인 우리. 

우리는 보통 주말 이틀 중 하루는 산책을 나가고, 하루는 집에서 집안일(청소, 빨래 등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일요일인 오늘도 다르지 않아서 각자 할 일을 나눠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누가 무엇을 담당할 것인지 이야기를 하며 대충 거실, 방 등 크고 어렵지 않은 (내 기준) 청소가 끝나가는 중이었는데 부엌을 청소하던 남편이 내게 화장실 청소를 맡겼다. 지누션의 션 남편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결혼한 정혜영은 한 번도 음식물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던가 화장실 청소를 해본 적이 없다고 어느 예능에서 말하던 게 떠오른 순간이었다. 또한, 내 친구 중 한 명이 결혼하기 전 남자 친구가 자신의 자취집에 와서 화장실 청소를 다 해주고 가더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런 남편이 아니라서 빡쳤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도 화장실 청소를 남편에게 미루고 내가 부엌을 청소할게 라고 할 수 있었겠으나 우리는 사정이 다르니 바로 이 이유다. 

 지난번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남편에게 화장실 하수구 청소를 해달라고 했었다. 내 기준에 딱 맞게 깨끗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직접 가서 알려주다가 하수구에서 끌려 나온 그것(!)을 보고는 나는 '윽 더러워'라고 그냥 지나가는 반면 남편은 부엌의 싱크로 달려 나갔다. 대충 뭘 했을지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대화를 나누다 진짜로 약간의 불순물이 식도를 거쳐 올라왔다는 (더러워진 글에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보다도 더 비위가 약하구나 싶었다. 나는 그저 우웩- 하는 액션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결과물이 있었다니. 

 무튼 그런 긴 이유로 나는 화장실 청소를 해달라는 남편의 말에 "그래 알겠어." 하고 바로 순응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떠오르게 된 생각들을 글로 남겨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던 것이다. (본문보다 서론이 더 길어질 것 같다.) 

 바닥부터 천천히 화장실 청소를 해가는데 물에도 때가 끼는 게 보였다. 우리 집 화장실은 반 건식 화장실이라 샤워실이 아닌 전체 바닥은 한 번씩 대청소를 할 때면 물을 뿌리고 그렇지 않으면 청소기로 먼지만 빨아들이는 식이다. 오늘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라 물을 뿌리고 다 쓴 샴푸통의 남은 샴푸를 세제를 뿌려가면서 솔로 빡빡 닦아나가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기는 하지만 물을 뿌리니 올라오는 작은 먼지 뭉치들. 샤워실에 낀 물때를 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때를 만드는 일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지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회에 어떤 큰 영향을 못 끼치고, 그저 숨을 쉬며 살아가는 한 생물일지라도 나는 때를 만들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물때를 청소하고 나면서는 '살아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때를 만드는 일이고, 그때를 다시 없애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같이 떠올랐다. 살아간다는 것은 때를 만들어 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때를 없애는 일이기도 하는 일이라는 사실. 

 생각해보면 우린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요리를 해 먹고, 그 요리한 그릇을 씻어내고. 먼지를 만들어 내고 그 먼지를 치워내고.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그 쓰레기를 갖다 버리고.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들이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또 치워가는 일의 반복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그게 그렇게 큰 마음의 평안을 줬을까. 한국에서 자기 밥벌이를 해가며 자기를 스스로 챙기는 삶을 살다가 남편을 따라 외딴 나라로 오면서 내 모든 커리어가 순식간에 멈춰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타의적 전업주부가 되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났었던 것 같다. 내가 한 결정이었지만 그게 이만큼이나 내 존재감에 대해 큰 타격을 입힐 줄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집안일이라는 것은 매일 생겨나고 매일 해나가지만 티가 안나는 일 중의 하나이니, 회사에서 발전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일에 비해 존재감이 적게 느껴지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화장실 청소에 대한 단상'을 하면서 내가 누군가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때를 만들고, 또 그때를 치워가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깨달음. 

 밥벌이를 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낸 때, 우리 가족이 만들어 낸 때를 치워가는 나도 오롯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일상의 반복으로 이루어지고,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때를 만들어가고 치워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나는 하나의 생명체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던 거였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 건져낸 내 자존감과 존재감이라니. 

이것들을 화장실 청소를 하다 되찾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나보다 약한 비위로 내게 화장실 청소를 맡겨준 남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 음. '고마워'라고 말하기엔 스크래치는 났을지언정 아직도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이 남아있다. 그게 쑥스러움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는 이 글은 이 정도의 글을 읽을 수 있는 한국어 실력이 되었을 때 남편에게 보여주기로 하고 숨겨두기로 한다. 






(글을 발행한 뒤, 결말에 살짝 수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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