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를 본 남편의 새로운 말버릇
한국의 위상이 날로 날로 높아져간다.
K-pop으로 쏘아 올린 한국 콘텐츠의 인기는 K드라마를 지나 요즘은 또 코로나에 잘 대처한 나라로 외신들에게 칭찬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실 K-pop이 인기를 끌던 시점, 아주 오래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최근에 BTS의 인기는 내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것들이었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의 유튜브 조회수가 1억을 넘었네 어쩌네 할 때도 '아 그냥 웃기니까 많이 보나' 이 정도였다. 그게 몇 년이 흐르고 BTS로 터졌을 때조차 내 친구들이나 나나 BTS가 누군지 잘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내 나이 탓을 해본다.) 어쩌다 노르웨이에 와서 살게 되면서 노르웨이의 도서관에서도 BTS를 소개하는 책이 한복판에 전시되어있는 것을 보고 '아 미디어에서 보던 것이 진짜구나.' 싶었다.
노르웨이에 오고 나서 노르웨이어를 배우기 위해 어학원을 다니며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 친구들 중에 Laura라는 콜롬비아 친구가 있었다. 어느 모임날, 우리는 자연스레 넷플릭스로 무엇을 보는지 이야기를 나눴고 그녀는 녹아내리는 듯한 남미의 어투로 "'Crash landing on you(사랑의 불시착)' 너무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다."며 눈에 하트를 그리며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아직 본 적이 없어서 "아 그래? 근데 네가 말하는 게 더 사랑스럽다." 하며 넘어갔더랬다.
프랑스 남자 친구가 있는 친한 친구는 얼마 전에 남자 친구를 따라 타국에 살게 되었다. 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그녀는 잠깐 우울했었고 그 시기에 프랑스인인 남자 친구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며 우울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면 넷플릭스에서 현빈을 봐."라고 말했다고. 아. 잘생긴 얼굴을 보고 기분이 나아지는 게 한국에서만 하는 유머가 아니구나 하며 웃었다.
코로나로 인해 남편도 재택근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구경 다닐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문을 닫으면서 우리 부부도 드디어 넷플릭스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넷플릭스를 구독했던 적이 있는 나는 '넷플릭스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해 뭘 봐야 하나 뒤지기만 30분 하다가 그만 두기 일쑤였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남편은 뭐가 재밌다더라 하면 보기 시작해서 주구장창 틀어놓고 보기 시작했다. 기묘한 이야기, 나르코스 등등을 지나 그는 영역을 K드라마까지 넓히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저렇게 계속 한국 드라마를 보면 남편의 한국어 실력도 많이 늘겠지.' 하는 정말이지 낙관적인 희망을 가졌었다.
그렇게 우리가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이태원 클라쓰'였다. 어어, 웹툰으로 봐서 이미 아는 스토리지만 빨려 들어간다. 복수를 꿈꾸며 자기가 목표한 것을 한발 한발 이뤄가는 멋진 성장 드라마였다. 복수로 시작된 스토리였으니 폭력적인 장면도 많았고, 욕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어어. 남편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IC 하고.
엇? 한번 듣고는 넘겼다. 드라마에 또 IC가 나왔다. "IC." 웃으며 따라 하는 남편. (아, 이 표정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뭐야 벙쪄하는데 자기는 재밌다며 IC, IC를 천진난만하게 따라 하는 그 얼굴.) 드라마에 자꾸만 IC, IC가 나왔다. 남편은 그 소리가 웃기는지 드라마를 보며 아기가 말을 배우듯 따라 했다. 그리고는 아기가 말문이 트이듯이 생활 중에서 IC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 이런 C. 한국어를 배우나 했더니 한국어 욕을 배웠다.
젠장. 실패다.
하필이면 그렇게 욕이 많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할게 뭐람. 남편은 청소를 하다가도 IC, 요리를 하다가도 IC. 자기가 무슨 한국인 원어민이라도 되는냥 자연스레 IC를 내뱉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그거 나쁜 말이니까 말하지 말라고, 어른 앞에 가서 모르고 그 말 하면 큰일 나는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렇게 '아 정말~!'로 합의를 봤다. 아 정말~!. 저 3살 아기 같은 한국어 실력을 조금이나마 업그레이드 시켜볼까 했던 나의 계략은 3살은 못하는 언어로 업그레이드되어 버렸다.
K드라마를 통해 남편의 한국어 공부를 자극한다는 나의 첫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버렸다. 남편은 그 드라마를 통해 배운 단어가 'IC'뿐이다. 전략을 바꿔야겠다. 어떤 드라마인지가 중요한 거다. 어디 로맨티시스트 남자가 나와서 부인한테 엄청 잘하고 막 그런 드라마 없나. 로맨스 물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남편이 거기서 어떤 달콤한 말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내 피부가 닭이 되는 걸 감내해 볼 텐데. 아니면 차라리 시트콤을 찾아보자. 이런 게 진짜 개그지 하면서 남편의 저 아재 개그 좀 바꿔보게. 아, 무슨 드라마를 봐야 하나 고민해야 하다니. K드라마의 영향력이 이렇게나 높아서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