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홍 Sep 07. 2022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너 정말 나쁘다. 진짜 나쁘다라는 메시지를 받다.


프롤로그

너 정말 나쁘다. 진짜 너무 나쁘다. 라는 메시지를 받다.



1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연출한 <THE WORST PERSON IN THE WOLRD>라는 영어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이다. 이상하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라는 명사는 어쩌다가 하나의 명제 같은 제목으로 변하게 되었을까.


2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사랑을 하는 ‘누구나’들은 모두가 최악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악의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세상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최악’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랑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인 것은 아닐까.


3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사이를 열두 개의 챕터로 채운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다. 주인공 율리에가 있고, 여성 율리에와 연애를 하는 두 명의 남성 악셀과 에이빈드가 나온다. 이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율리에가 악셀과 에이빈드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율리에가 대놓고 왔다갔다거리며 방황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의 선택을 내린 율리에는, 대체적으로 그 선택의 상대와 상당한 시간을 함께 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율리에는 우디 앨런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쉽게 첫눈에 반하는 사람인 것도 아니고, 또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 매니악>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육체적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다.




4

그런 율리에가 영화 내내 갈등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계속해서 더 좋은 것, 더 좋은 사랑, 그래서 궁극적인 최고의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율리에는 파티장에서 드레스를 입은 채 어딘가를 힐긋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율리에의 현재 심리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율리에는 지금 자신이 사랑하기로 선택한 악셀과 함께 악셀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장에 와 있지만, 여기서도 율리에가 집중하는 것은 현재의 행복이 아닌 미래의 불행이다. 그렇게 율리에는 혼잡한 연회장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정처 없이 길을 걷다 또 다른 파티장, 모르는 커플의 결혼식 뒤풀이가 펼쳐지고 있는 파티장으로 몰래 들어간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파티장에서,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본다. 물론 에이빈드도 이미 율리에를 본 상태이다.


5

이러한 율리에의 선택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쉽게, 그냥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아쉬운 점이 있는 상태라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는 ‘그래도 사랑하니까..’하면서 그 사랑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방법이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이 방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GOOD PERSON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6

그러나 누군가는 그러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상대의 90이 마음에 들지만 나머지 10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누군가는 100을 만나기 위해 90을 떠난다. 아니 그게 100일 거라는 100%의 확신이 없더라도, 단지 90에서 겨우 1이 나아진 91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과감히 90을 떠나버린다. 나는 지금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오직 이것만을 위해 바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나의 사랑의 방식을 두고 GOOD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백 번 동의한다.



7

아 방금 나라고 했었나. 아무튼 율리에는 기꺼이 BAD PERSON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더 좋은 사랑(BETTER LOVE)을 하기 위해 BAD PERSON이 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다. 망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동적인 사람인 것은 아니다. ‘망설이지 않는’과 ‘충동적’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려 깊은 고민 끝에 망설이지 않고 어떤 선택을 실행하는 사람과, 그냥 충동적으로 어떤 결정을 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둘 다 BAD PERSON일 수는 있지만, 둘 중에 누가 WORSE인지는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가려야 한다.


8

율리에가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 영화에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율리에가 악셀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별을 고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을, 영화가 알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해 쭉 늘려 놓은 그런 장면이다. 이별의 언어를 전달하기 0.1초 전까지,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던 율리에는 갑자기 시간을 멈춰버린다. 율리에가 부엌에 있는 스위치 하나를 누르자, 마치 영화 속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커피를 따르고 있던 악셀이 움직임을 멈춘다. 카메라는 이게 진짜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멈춘 악셀의 모습을 정면에서 보여준다. 거기엔 악셀이 따르고 있던 커피라는 액체가 고체가 되어 있다.


9

이 영화가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율리에가 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곧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악셀뿐만이 아닌 전 세계가 그대로 멈춰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율리에가 에이빈드가 일하고 있는 카페로 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가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덕분에 우리는 꽤 많은 오슬로 시민들이 제자리에 멈춰 있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 누군가는 뜨거운 햇빛을 가린 채 관광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그 햇빛을 원동력 삼아 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율리에는 이를 배경으로 새로운 사랑에게로 향한다. 마치 결혼식에 입장을 하는 주인공처럼. 모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서 있고, 식의 주인공만 애인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10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율리에의 사랑을 위해 모두를 정지시키는 영화다. 나 자신만의 '최고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정말 이기적이게도 다른 모두의 시간을 0으로 만들어버리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율리에는 최악의 인간, THE WORST PERSON IN THE WOLRD이다. 율리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악당들, 예를 들어 타노스보다도 나쁘다. 1/2만 없애버렸던 타노스는 완전 귀인이었던 셈이다.


11

시간을 멈춘 율리에는 에이빈드와 상상의 하루를 보낸 뒤 다시 악셀에게 돌아온다. 악셀은 아직도 커피를 따르고 있다. 율리에가 버튼을 누르자 고체였던 커피는 액체가 되어 다시 흐르고, 그런데 고체였던 악셀은 여전히 고체다. 악셀이었던 악셀은 여전히 악셀이다. 정말 사랑하는 악셀이지만, 율리에가 악셀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상상의 하루를 마친 율리에는 더 이상 악셀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율리에는 악셀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을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12

그래서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만나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됐을까. 물론 물론 물론 절대 아니다. 영화 후반부 율리에는 또다시 악셀을 떠올린다. 에이빈드를 사랑하지 않아서 악셀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에이빈드가 갖고 있지 않는 악셀의 어떤 면모가 생각났을 뿐이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말한다. "난 끝까지 해내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율리에가 끝까지 해내지 못한 것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율리에가 이걸 에이빈드에게 말한 거였나 악셀에게 말했던 거였나 헷갈린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는, 악셀과 에이빈드 입장에서 나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나를 그런 율리에를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챕터2에서 적은 명제가 '참'이어서, 나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라면?



에필로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에필로그에서 율리에는 혼자다. 심지어 우연히 창 너머로 사랑했던 OO가 가정을 꾸린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인 율리에가 받은 영화적인 벌일까. 그런데 신기한 건 이 벌이 꽤 받을만한 벌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수미상관의 영화다. 영화의 오프닝에도 율리에는 혼자고, 영화의 엔딩에도 율리에는 혼자다. 그런데 엔딩의 율리에, 즉 벌을 받은 율리에가 처음의 율리에보다 덜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오프닝의 사랑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율리에와, 엔딩에서 사랑 없이 홀로 세상을 버티고 있는 율리에의 차이. 어쩌면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이라는 명제는 정말로 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이 맞다.





메일링 연재하고 있는 원데이 원무비 27호에 쓴 글.

구독 신청은 아래에서 가능하십니다.


https://forms.gle/zNz7goqj3uJLJtHx8



작가의 이전글 아직 마주 볼 준비가 안된 재난을 영화화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