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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홍 Sep 14. 2022

주인공은 아무나 하나

원데이원무비 1호 : <지-니어스: 카니예 3부작>

주인공은 아무나 하나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들 합니다. 당신의 삶에 희망과 영감을 주고 동기부여 시켜주는 기분 좋은 말인 것은 맞지만, 아무나 영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현실 감각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습니다. 다른 말로는 철없는 사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놈, 영화 많이 보더니 내 그럴 줄 알았지, 현실 감각 잃고 영화 감각만 얻은 애.. 쓰다 보니 전부 제 이야기였네요. 첫글이니만큼 자기소개로 글을 시작해보려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글의 주인공 김철홍입니다.


김철홍은 그렇지만 이제는 현실 감각을 조금은 보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이를 먹으며 세상의 진짜 주인공들을 여럿 목격해가면서, 어쩌면 나는 주인공이 아닌 것일지도..?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된 상태에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어느덧 인정해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인정해버렸다는 것이 무엇보다 슬픕니다. 뭔가를 크게 실패한 뒤 훅 깨달은 것도 아니고, 그냥 살다보니까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요. 마치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산타클로스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제 엄청난 비밀 하나를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누구한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인데 감사한 독자 여러분께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엄마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메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을 중국 연길에서 보냈는데요. 그중 마지막 1년은 아빠 홀로 한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하셨는데, 그땐 국제 통화도 비싸고 그래서 메일로 자주 안부를 전하곤 했습니다. 제가 엄마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던 이유는, 컴퓨터와 키보드를 다루는 것이 서툰 엄마가 그것을 저의 도움없이 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엄마가 종이에 손으로 편지를 써서 저에게 건내주면, 저는 그것을 타이핑해서 전송하곤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메일을 기억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또 나중엔 엄마가 메일 보내는 방법을 익힌 뒤 혼자서 메일을 보내게 되기도 했구요. 그렇게 그 존재를 잊고 지내다 스무 살도 넘은 어떤 시기에 엄마의 업무를 도와주려고 메일에 들어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다가 호기심이 들어 엄마가 아빠에게 보냈던 메일을 읽은 것이었습니다. 그건 크리스마스 즈음에 보내진 짧은 편지였습니다. 엄마 혼자 타지에서 아들 둘을 키우느라 힘이 부쳤는지, 아직 14살 11살인 저와 동생에게 “중국은 성탄절이 국경일이 아니기 때문에, 산타가 없고, 그래서 선물도 없다.”라는 말을 하고 선물을 스킵한 것을 아빠에게 고백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덧붙여진 말이 재밌었습니다. 은철(동생)이는 믿은 것 같은데 철홍이는 반신반의인 것 같다고 적혀 있었거든요.


엄마는 아무래도 마음이 조금 걸렸나봅니다. 그래서 편지까지 쓴 거겠죠. 근데 저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나한테 거짓말을 한 기억도, 선물을 받지 못해서 서운했던 기억도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에게 서운한건 제가 산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언제인지, 언제 철이 든 것인지, 그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특별한 이벤트 없이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구나. 영화 보면 안 그렇던데. 뭔가 깨닫는 순간이 항상 드라마틱하던데. 이런 생각들이 내가 주인공이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곁들여져 가끔 저를 슬프게 했드랬죠.


만약 이런 저에게 누군가 “나 너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라는 말을 하면 저는 아마 거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뭘 했다고, 저는 딱히 이룬 게 없는데요, 다큐멘터리 찍힐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면서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티스트 칸예 웨스트가 주인공인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지-니어스: 카니예 3부작>(JEEN-YUHS: A KANYE TRILOGY)입니다.


칸예 웨스트는 반박의 여지없이 세계 최고의 뮤지션 of 뮤지션입니다. 자기 자신도 그 사실을 완전히 믿고 있는 사람이며,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2020년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다음 대선에도 역시 출마할 것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다큐가 나온다고 했을 때, 분명 칸예 웨스트의 엄청난 자뻑이 들어간, 자신이 이뤄낸 대단한 업적들을 기리거나 혹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그러한 다큐멘터리를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죠.


그런데 이 다큐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일단 이 다큐멘터리는 칸예의 시선이 아닌, 칸예의 오랜 친구 쿠디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쿠디는 칸예가 아직 유명하지 않을 때 칸예의 능력을 알아보는데요. 그래서 칸예가 어디까지 성공할지 그 과정과 끝을 담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카메라 하나만 들고 칸예를 따라다닙니다. 재밌는 것은 아직 첫 앨범도 내지 않은 ‘덜 유명한 칸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아직은 다큐멘터리를 찍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 칸예가 그걸 승낙하고 항시 카메라를 따라다니게 한다는 것입니다.


관련해서 영화에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카메라 뭐 하는 거냐”고 묻는 다른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그중엔 진짜 그 용도가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몇몇은 마치 대스타처럼 카메라를 대동하고 다니는 칸예가 우스워서 비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지금의 칸예였다면 아무도 이걸 왜 찍는 거냐고 묻지 않았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칸예는 그런 질문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칸예가 자신의 첫 앨범 <칼리지 드랍아웃(The College Dropout)>을 발매한 것은 2004년인데요. 3부작 중 절반은 칸예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첫 앨범의 투자를 받기 위해 여러 음반 제작사의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랩을 하거나 자문을 받는 등, 혼자서 셀프 홍보를 하는 모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의 그 건방진 칸예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면서, 동시에 이런 칸예도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동네 영화관에 가서 전단지라도 돌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뉴스레터의 시작을 알리는 글에, 더 많이 봐달라고 길거리에서 랩이라도 해야 될 판에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힙합 뮤지션의 다큐멘터리를 다룬 까닭이 있습니다. 칸예의 2001-2004년의 모습이 지금의 제 시기와 겹쳐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어딜 감히 칸예랑 너를 비교하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이 카메라 뭐냐"고 묻는 사람들처럼, "칸예랑 자기 자신을 엮는 이 글 대체 뭐냐"하며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이제 막 무언가를 시작한 상태인 것만큼은 같으니까요. 그렇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칸예 웨스트는 그런 남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끝까지 믿었다는 것, 그 믿음을 바탕으로 카메라를 계속해서 켜두게 했다는 것입니다.


철홍은 반면 그동안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말과 글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일까 신경쓰느라 아무런 도전을 하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을 낭비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낸 칸예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제 나를 믿고 나를 찍어보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뉴스레터는 사실 편지가 아니라 카메라입니다. 더 정확히는 아무도 안 찍어줘서 내가 나를 찍는 셀프 카메라입니다.


다시 한 번 안녕하세요. 김철홍입니다.

매주 여러분께 김철홍의 일주일을 보내드립니다.

부디 저의 쿠디가 되어 저의 활약을 지켜봐주시기를.




p.s 엄마한텐 비밀 꼭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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