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초능력은 왜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일까?
씨네21 1426호에 <무빙>에 대해 적은 글.
<무빙> 속 히어로들의 초능력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됐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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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랑 애 하나 가지고 사업을 벌여?” “그래봤자 겨우 둘?” <무빙> 15화에서 민용준(문성근)의 수행 비서인 여운규(김신록)는 국가재능육성사업을 시작하자는 조래혁(유승목)의 의견에 반발하며 이런 말을 한다. 아직 여물지 않은 초능력을 지닌 아이 몇명만을 바라보며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굴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결국 국정원이 육성사업을 진행함에 따라 이와 같은 여운규의 판단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 하지만 여운규가 사용한 ‘겨우’와 ‘꼴랑 OO 가지고’라는 표현만큼은 완전히 틀린 말로 느껴지지 않는데, 그건 이 말이 <무빙>이라는 드라마를 이제 막 접한 사람들의 첫 반응과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꼴랑 이런 초능력을 가지고 히어로물이라고 한다고?’ ‘겨우 이것밖에 없다고?’
이것이 <무빙>을 본 모든 사람들의 반응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콘텐츠를 ‘히어로물’이라고 규정했을 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비롯한 다양한 거대 프랜차이즈 히어로 시리즈물에 익숙해져 있는 대다수의 관객들은 <무빙>이 선보이는 초능력을 다소 평범한 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 극이 진행된 다음,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한 시청자들은 <무빙>의 진짜 매력이 초능력의 스펙터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무빙>은 충분히 볼만한 드라마다. 그럼에도 히어로물에 붙은 ’이것밖에 안된다’라는 딱지는, 작품의 매력과는 별개로 <무빙>이라는 세계를 얕잡아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나 역시 <무빙>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론 계속해서 ‘정말 이것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다만 이건 히어로들의 빈약한 능력(혹은 강풀 작가의 빈약한 상상력)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 아니다. 내가 이 매력적인 세계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여기에 초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오직 ‘이들밖에는’ 없었을까에 관한 것이다.
겨우 이 정도의 초능력으로
<무빙>은 큰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좁다. <무빙>은 시리즈 초반부엔 미국 CIA 소속 초능력자인 프랭크(류승범)가 국정원의 은퇴한 블랙 요원들을 암살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 세계에 뭔가 거대한 흑막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주요 서사로부터 분리되어버리고, 그 후 모든 이야기는 “꼴랑” 세명의 미숙한 초능력자 학생이 있는 정원고등학교에서만 진행된다. 전세계에 그 힘을 가늠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시작된 이야기, 말하자면 정원고(와 한반도)의 밖을 상상하게 하던 <무빙>은 그렇게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관련해서 프랭크가 웹툰 원작에 없었던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라는 점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시리즈 초반의 몰입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를 기능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무빙>에 대한 아쉬움은 그 능력 자체만 따지고 봐도 지적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히어로치고 너무 약한 것도 맞고, 개성 또한 부족하다. 일단 가장 분량이 많은 두 주인공의 핵심 능력은 비행 능력과 무한 재생 능력뿐인데, 이는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히어로 캐릭터들이 거의 대부분 지니고 있는 ‘패시브 스킬’(기본 능력)에 불과하다(무엇보다 세상에 날지 못하는 히어로는 드물다). 뿐만 아니라 재만(김성균)-강훈(김도훈) 부자의 힘과 스피드 역시 뚜렷한 차별점이 보이지 않고, 미현(한효주)과 계도(차태현)가 각각 자신의 감각과 전기 능력을 활용하는 모습 또한 전형적인 히어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무빙>에 등장하는 능력자들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대단한 히어로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무빙>을 보다 보면 겨우 이것밖에 안되는 인물들로 히어로물을 만든 것에 대한 반발심과, 계속해서 이들 외의 다른 능력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상상력이 차오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빙>은 앞서 말했듯 종장에서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하여 작품에 대한 의구심들을 날려버리고야 마는 드라마다. 물론 유사 영화에 등장하는 스펙터클한 장면이 있는 건 아니다. <범죄도시>처럼 처음부터 압도적인 히어로가 존재했던 건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여러 히어로들의 경우처럼 후반부에 드라마틱한 각성을 하여 엄청난 레벨업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무빙>은 처음부터 끝까지 히어로영화적이지 않다. 능력이 ‘이것밖에 안된다’는 것은 히어로물의 치명적 약점이지만, 작가 강풀은 절대 히어로들의 능력을 그것 이상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그렇게 아쉬운 대로의 능력을 그대로 안고 가며 마침내 모두가 살아남는 엔딩에 도달했을 때, 이것밖에 안되었던 모든 것들에 관한 필연적인 이유가 납득되고야 만다.
액션이 아닌 로맨스를 위한 능력
<무빙>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작가의 이런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히어로를 만드는 것은 그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빙>의 히어로들은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현저히 모자란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끝내 각자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며 본연의 의미로서의 영웅이 된다. 우리 모두는 절대로 히어로들의 능력을 흉내낼 수 없겠지만, 각자 누군가의 영웅이 될 수는 있다는 것이 <무빙>이 스스로 제한한 능력과 상상력에 담긴 의미다. 특히 드라마 말미에서 희수(고윤정)가 어떠한 초능력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많이 아프죠?”라는 말 한마디로 북측 요원인 용득(박광재)을 무력화하는 장면은, 인간 종족이 패시브 스킬로 장착하고 있는 공감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그런 측면에서 <무빙>에 등장하는 초능력들은 국정원의 기대처럼 전투에 적합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사실 누군가를 지키는 것 혹은 더 큰 의미에서 사랑을 하는 데 최적화된 능력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가정보원이라는 곳이 본디 전투 자체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두식(조인성)의 비행 능력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위기에 처한 미현과 봉석(이정하)을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하늘에 떠오르는 장면이고, 주원(류승룡)의 최고의 순간 역시 죽을 만큼의 고통이 반복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순간들이다. 미현의 “자식을 지키기 위해선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어”라는 대사 또한, 자신의 능력의 본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음을 알리는 대사다. 그러니까 <무빙>은 주원과 지희(곽선영)가 연애를 하는 에피소드에서 자주 반복됐던 그 말처럼, 확실히 히어로 액션물이 아니라 로맨스물이다. <무빙>의 히어로들이 이것밖에 안되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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