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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zzie Oct 08. 2015

내 안의 인격들

"'쿨하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2015년 초에는 '킬미힐미' '하이드 지킬, 나'라는 드라마가 동시간대에 다른 채널에서 방영했었다. 두 드라마 모두 다중인격을 가진 주인공을 소재로 했다. 지성과 현빈... 여자들의 마음을 소위 '심쿵'하게 만드는 주연배우들이었다. 그리고 인상적 이게도 두 드라마가 표현해낸 다중인격은 요술이나 마법에서 비롯된 재미가 아니라 주인공의 상처에서 비롯된 정신병이었던 것이다. 생각 없이 보기에는 아까운 소재라 나는 사회 이슈들과 연관 지어 나름대로 의미를 찾고 있던 찰나였다. 그 즈음 중앙일보 칼럼 "[시선 2035] '쿨하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 다들 조금씩 아프지 않은가"를 읽게 되었고 어쩌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조금씩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여러 포털사이트를 켜 놓고 커피 한잔과 함께 뉴스피드를 읽어가는 것이 생활의 습관이 되었는데 습관은 정말 습관일 뿐 즐거운 마음으로 헤드라인과 기사를 읽는 경우가 드물다. "3월이 되니 꽃봉오리가 보이고 꽃 놀이를 가는 시민들이  늘었다"와 같은 기사는 찾아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업의 스트레스를 견디기란 쉽지 않고 치열한 경쟁 끝에는 취업경쟁이 코 앞에 둔 대학생이자 졸업유예생이자 취업준비생들. 직장을 얻은 기쁨도 잠시, 사회생활과 결혼과 육아, 자녀문제, 노후대책을 걱정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헤드라인 속 키워드 만으로도 우리가 공통적으로 어떤 것들을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견디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헤드라인 기사들을 확인한 후 SNS에 접속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인다. 어둡고 희망이 없어 보였던 세상은 어느새 알록달록하고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하며 걱정 따위 없는 세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 자신들의 "멋진" 삶을 뽐낸다. 사람들이 최고라고 부르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3년, 아니 지난 십 년 동안 학교와 학원만 드나들었지만 입시 이후 자유롭게 먹방을 찍고, 놀러 다닐 수 있는 삶이 있다. 공채 면접에서 또 최종 탈락했지만 부모님의 눈초리를 벗어나 친구와 커피 한잔을 하는 여유로운 삶이 있다. 아침부터 출근길 지옥철에 목숨을 잃을 뻔하고 출근하자마자 쌓인 일을 하고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퇴근길에 친구 맥주 한잔을 할 수 있는 삶도 있다. 사람들은 보기 좋고 예쁜 것들은 더 미화시키고 과장시켜서 뽐내 보여 본다. 그렇게 뽐낼 수 있는 순간들이 실제 인생에 10%도 차지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SNS에서 만큼 나는 100% 행복한 삶을 살기를.. 10%에 감사하는 삶이라며 포장해두고 나머지 90%는 감추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쿨" 한 셀프를, 행복한 셀프를, 멋지고 훌륭한 삶을 즐기는 셀프를, 맛있는 것을 먹는, 예쁜 옷을 입는, 아름다운 연애를 하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는, 셀프를 갈망하고 그것들을 누릴 때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어 한다. 꼭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외쳐야 한다. 왜냐하면 내 주변 사람들, 나의 온라인 친구들은 정말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드라마 속 다중인격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게 이미 우리 자신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 놓은 것이 아닐까. 우울한 나, 슬픈 나, 지친 나, 힘든 나를 다른 인격으로  방치해두고, 예쁜 나, 행복한 나, 쿨한 나, 패셔너블한 나를 또 다른 인격으로.. 전자의 인격들이 튀어나올 때면 숨고 후자의 인격들이 튀어나오면 한껏 치장하고 나들이를 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킬미힐미에 차도현(지성)은, 자신의 가장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인격과 마주하고 그 인격을 인정해서 비로소 조각난 인격들을 한 군데 모아 다중인격 장애를 극복하게 된다. " '쿨하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숨기고 싶었던, SNS에 올리지 않은 90%의 인생을 바라봐주고 싶다. 우리가 힘들다고 외칠 때, 그리고 세상이 그것을 들어주고 인정해주고 해결해 주려고 노력해줄 때 비로소 아픔이 치유되고 보여주기 식의 삶이 사라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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