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아침을 별 생각 없이 맞이할 때가 많다. 그러나 매일 맞이하는 이 아침은 전혀 새로운 오늘만의 아침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늘 내게 주어진 이 하루를 감사로 시작할 수 없고, 감동의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오늘 이 하루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제와 다를 것이 없겠지만, 어제 죽어간 사람들에겐 그토록 그리워했던 내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하루의 아침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려주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과 극도의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무감각, 무감동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먹고 산다는 것이 너무 고단해서 그런지 몰라도, 기뻐도 기뻐할 줄 모르고, 슬퍼도 슬퍼할 줄 모르는 메마른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맞는 성경적 비유가 떠오른다. 피리를 불어도 춤출 줄 모르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비유다(마 11:17).
감동이 없는 사회나 개인은 소망이 없다. 감동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없거나 충만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되면 하루하루를 감동하며 살아가게 된다. 성령은 감동의 영이다. 성경도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되었으며, 성경의 위대한 인물도 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다.
다윗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동의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수많은 날을 위기 속에서 살았다. 또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죽고,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도 겪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동할 줄 알았고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시편의 많은 내용들은 다윗이 하루하루의 삶을 얼마나 감동 있게 살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깊이는 그의 감동의 깊이를 나타낸다.
예레미야도 감동할 줄 알았던 선지자였다.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많은 유다 백성들이 살육을 당하는 참상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실 것을 보고 아침마다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 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3-24)
그러므로 예레미야 애가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감동의 노래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우리에게 삶의 모든 자락은 감동의 근원이 된다.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나를 알고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감동의 샘터다.
감동이 쌓여 나갈 때 은혜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감동하며 살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