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제법 이른 나이에 손에 쥐었다. 엄마가 불은 못쓰게 했는데, 칼은 과일깍으라고 일찍 쥐어줬다. 칼을 잡은 뒤로는 목표가 엄마였다. 엄마는 사과를 끊기지 않고 주욱 깎아냈고, 오이채를 착착착 정갈하게 채쳐냈다. 어떻게 손가락 안다치게 저렇게 할 수 있지? 나도 하고 싶다! 먼저 과일껍질을 끊기지 않고 깎아내기. 안 끊기고 깎을 수 있을 때까지 꽤많은 단감과 사과를 깎아야했다.
사과 껍질을 잘 깎아내게 되고 난 다음엔 채써는 것에 집중했다. 그때 당시 일식 돈까스집에서 나오는 얇은 양배추 샐러드에 참깨소스 뿌려먹는 것이 유행했는데, 마침 채치고 싶은 나의 욕망과 부합하여 양배추가 내 칼질의 대상이 되었다. 칼이 양배추에 닿으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와, 칼과 도마가 닿아 내는 타타타닥 소리는 스트레스 풀기에 최적이었다.
그래서 칼질은 왠만하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중 어느 요리수업에서, 선생님께서 양파를 썰고 도마에 이렇게 즙이 많이 흐르면 안된다고 하시는것. 응? 양파를 다지면 당연히 즙이 흥건한거 아닌가? 선생님께서 시범으로 보여주시는 양파다지기를 보고 충격을 먹었다. 칼이 양파를 사뿐사뿐 다져냈다. 도마엔 하나도 즙이 남지 않았다. 충격.....
아.. 빨리한다고 잘하는게 아니고, 제대로 정확히 썰어야 하는거구나.
그때부터 칼질의 속도를 줄이고 칼질의 상태를 살폈다.
모양은 일정하게! 즙은 안나오도록!
칼도 다시 보였다. 칼날이 날카롭게 갈려있어야 재료가 짓이겨지지 않고 날카롭게 잘린다. 칼날의 두께도 중요했다. 재료는 딱딱한데 칼날이 두꺼우면 재료가 쪼개지기 쉽고, 쪼개진 단면에서 즙이 많이 생긴다. 모양이 일정해야 맛이 균일하고, 즙이 나오지 않아야 재료 안에 즙이 가득 머금어진다. 칼은 그렇게 쓰는것이구나!
그렇게 칼도 바꾸고, 되도록 칼날을 잘 갈아서 쓰고 하면서 계속 칼질을 관찰했다. 익숙하지 않으니 자꾸 오른팔에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히 왼팔과 왼손에도 힘이 많이 들어가게되어 재료를 너무 꽉 쥐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즙을 짜고 있었다.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오른쪽의 내 팔의 힘을 편안히 쓸것. 왼쪽의 내 손이 재료를 편안히 잡을 것.
그러니까...
나와 재료를 괴롭히지 않을 것.
괴롭혀진 재료는 요리에서 괴로운 맛이 난다.
칼에 익숙해지는 방법은 많이 썰어보는 것 말고는 없다.
다양한 종류를 썰고, 한종류를 익숙해질 때까지 썰고.
아무생각없이 써는게 아니라, 이 재료가 다치지 않았을까? 이 재료를 괴롭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썰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썰고 또 썰어야한다.
많이 썰지만은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 쉬이 무너지고 쫒기는 시간에 타협한다. 하지만 나중에 맛을 보고 후회한다. '제대로 썰걸...'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칼질을 할때면 항상 떠오르는 이야기라 붙여본다. 이렇게까지나? 싶지만, 칼을 제대로 쓴다면 이렇게까지 해야겠다 하고 생각한다. 칼질.. 참 단순하지만 어려운일이다.
장자 양생주편 포정해우 庖丁解牛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이는 손끝의 재주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마음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마치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군데, 뼈와 힘줄이 엉켜 있는 곳에 다다르면 그것이 어려운 일인 줄 알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여 눈은 한 곳을 응시하고 칼질은 더디어지고 칼놀림이 몹시 미묘해집니다.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일이 끝나면,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흐뭇해져 칼을 닦아 넣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