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먹어!”
엄마의 밥먹으라는 이야기가 그렇게 싫었다. 살찐단 말이지… 쌀때문에 살찌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때문에 살쪘을 것인데 쌀의 탓을 했다. 밥보다 얼마나 맛난게 많은데, 밥보단 반찬이 더 맛있고, 빵과 면은 또 얼마나 맛있게… 밥 먹을 틈은 없지.. 딸년은 밥을 보이콧 하는 와중에 엄마는 그렇게 밥을 먹었다. 바쁜 와중에도 서서 물말아먹고, 비싼 외식 하고 와서도 소화가 안된다며 밥에 김치를 한수저 하고 나서야 쑥 내려간다 했다. 엄만 왜저러시나…
일본에 살 때 밥맛을 배웠다. 일본 쌀이 맛있어서 밥이 맛좋다라고 느꼈던 건지 아니면 마음의 허기짐에 흰밥에 김치 척 올려 김에 싸먹는 것에 위로를 받았던 것인지 지금와서는 긴가민가 하지만,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의 신주쿠를 걷고 집에 들어와서 그렇게 밥을 먹었다. ‘그려! 숙취엔 밥이지!’
그전엔 ‘밥’을 한다는 직책(?)이 없었지만, 결혼하고는 밥을 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전엔 전자레인지의 시작버튼을 눌렀다면 결혼하고는 전기밥솥의 취사버튼을 눌렀다. 라면 물 맞추는 것 만큼이나 밥 물 맞추는 것이 어려웠다. 손톱까지, 손등까지 라는 감은 대체 무슨 기준인지. 철저한 계량아래 밥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밥은 거의 김슨생 것이었다. 같은 요리를 두고도 김슨생에는 반찬이고 나에겐 술안주였으니. 술이 밥을 대신했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밥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밥? 하고 밥에 물음표를 찍게된 것은 요리를 배우면서 부터다. 마크로비오틱에서는 현미밥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 했다. 곡물이 기본이 되는 중심이 되는 생활이 중용이된다고 했다. 가르쳐주신대로 했던 것 같은데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안익거나 아니면 불어터지거나… 가끔 잘될때도 있었는데 왜 잘됬는지 몰라서 결국 또 해매고… 그런데도 현미밥을 자꾸 시도했던 것은 친구네 집에서 먹었던 그 보드라운 현미밥에 대한 기억때문이었다. 꽉찬 스트라이크 같은 맛. 다른 것 필요없고 딱 그 현미밥만 있어도 될것 같은 그런 꽉참때문에.
난 현미밥이 죽어도 되지 않았다. 잘, 딱 맞게 익지 않은 밥은 맛있지 않았다. 그래서 백미를 종종 먹었다. 백미도 막 도정해서 지은 밥은 윤기가 좌르르르. 그리고 나는 압력 밥솥에 눌린 쫜득한 밥보단 공기반 밥반 같은 고슬고슬한 밥이 좋아서 냄비밥을 많이 지었다. 그렇다고 이젠 냄비밥을 눈 감고도 해!는 아니고.. 되려 곤란하게 이제 햇반과 전기압력밥솥은 눈감아줄 수 없어!가 되어버렸다. 곤란하고도 불편한 감각을 장착해 버렸다.
밥을 어떻게 하면 잘 지을 수 있을까?
밥만 잘 지어도 한끼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꼭 한번은 명확히 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쌀이냐, 쌀이 얼마나됬느냐, 어떤 솥에 짓느냐, 그날의 습도는 어땠느냐 등등 그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세상에 나와있는 정보들은 영 탐탁치 않다.
현미밥 친구와 다시 만났다. 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현미밥이 안되 라는 이야기 부터 시작했다. 압력, 무압력, 물의 양 같은 조리에 대한 이야기 부터 밥에 대한 영양, 왜 마크로비오틱에선 곡물을 중심으로 뒀을까, 왜 사람들은 밥을 안먹을까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러한 이야기에 그 친구는 ‘밥이 무너져서, 밥상이 무너진 것이 아닐까’ 라고 이야기했다. 격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도 밥을 잘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바로 섰다.
나도 어릴땐 밥상쯤 무너질 수 있지 생각했지만, 이젠 밥상이 무너진다는 것은 내 마음이 헛헛해지고, 세상을 재미있게 지낼 힘이 채워지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밥냄새로 엄마가 나에게 심어준 힘을 기억하고, 밥과 함께 차려진 반찬으로 땅과 바다의 계절을 느끼고, 따끈하게 끓여진 국으로 영혼을 데우고, 그 밥상에서 나눈 이야기로 하루를 채우고.. 그리고 그 밥상에서 밥상을 채운 사람들의 삶이 따뜻해짐을 어렴풋이 안다.
그래서 밥을 알아가 보려고한다. 어디까지 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