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도 아닌데 휴가 가는 거, 굉장히 영리한 선택입니다. 박수 쳐주고 싶어요. 회사란 게, 휴가일 때 휴가 가면 오히려 눈치를 보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비수기에 휴가 가는 건 "나는 나를 지킬 줄 안다, 그러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시오"라는 선언을 아주 세련되게 하는 일이죠.
근데, 우리 사이에 뜬금없이 웬 존댓말이냐구요? 평소대로 너나들이도 좋겠죠. 근데 이건 편지잖아요. 꺼내고 나면 사라지고 마는 탕비실 수다는 아니니까요. 친한 사이에 오히려 소홀해질 수 있는 정중함을 이렇게라도 꺼내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때 했던 얘기 기억나요?
발렌타인데이 무렵에 나한테 했던 얘기 기억나요? 월례회의 때 L전무가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갈궈대길래, 회의 끝나고 주임님이 그랬잖아요. "있지, 진짜 인성하고 성공은 상관이 없나 봐."
그때 나는 인성과 성공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잠시 고찰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사실 L전무라는 인물이 굳이 그런 진지한 고찰을 필요로 하는 부류가 아니어서 금방 그만둬 버렸죠.
그 날 일도 그래요, 전무가 하는 레퍼토리라는 게 뻔하죠. 1. 전략회의 때마다 내가 면이 안 선다. 2. 왜냐? 우리 팀이 성과도 안 나는데 돈은 많이 쓴다. 3. 그러니까 협력업체 비용을 낮춰라.
전무가 이 얘기를 무한반복하고 있는데, 과장이 진짜 조심스럽게, 우회적으로 돌려 돌려서 "그 정도는 써야 일이 돌아간다"고 말하니까 그 재수 없는 한숨 쉬면서 경멸조로 그랬잖아요. "자넨 평생 과장만 해."
회사에서 만나는 높으신 분들, 성격 좀 별로일 수 있죠, 그쵸?근데 성격만 별로면 말도 안 하죠.
얼마 뒤에, 벚꽃 필 무렵에갑자기 전무님이 대리 이하 2년 차 주임들만 따로 불렀던 거 기억나요? 새 식구들 밥 좀 사주면서, 자기도 트렌드 좀 배우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그때 내가 좀 깼던 게, "내 법대 동기 딸내미가 예술을 하는데, 혹시 한종대라고 들어봤나?" 이러는 거예요. 처음엔 무슨 아티스트 이름인 줄 알았잖아. 얘길 들어보니까 한종대라는 게, 한예종,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몰라서 이상한 이름을 지어낸 거였어요.
현실에는 직함에 힌트가 없어요
회사 배경인 드라마들 보면, 임원들은 악역으로 나와도 매력이 있거나 그럴듯한 설명이 붙죠. 그러니까 엄청 똑똑하다든가, 배신에 능하다든가 하는 식으로, '저 정도 나쁘면 능력치가 그만큼 받쳐주는구나' 하고 믿게 만들잖아요.
근데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힌트가 하나도 없어요. 직함 보고 '저 사람 꽤 성공했구나' 짐작만 할 뿐이지, 사실 그 타이틀에 한예종을 몰라서 한종대라고 하는 게 나한텐 너무 우스운 거예요. 드라마였으면 완전 설정오류지.
인성이란 게, 나이스하게 최소한의 예의 지키는 것도 있겠지만 넓게 잡으면 보통 사람이라면 기대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라고 봐요. 성실한가, 내가 아는 만큼 아는가 뭐 이런 거.
전무쯤 되면 회사 한 25년 다닌 거잖아요? 세월이 얼만데, 일도 엄청 했겠지. 그리고 잘했으니까 남들 다 떨어져 나가는 동안 전무까지 됐겠지. 근데 대체 이해가 안 가잖아요. 상식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인간에 대한 선이, 저 사람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최선을 다해도 선택 못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문제가 하나 남아요. '저 사람이 생존율 0.1%라는 임원이 된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비합리적인 성과를 요구하고, 대학 이름을 몰라서 이상한 이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게?
20년 전에 무선사업부가 잘 나갈 때 얘기예요.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기종을, 천만 대씩 팔았대요. 요즘은 하나도 못 파는 거기 말이에요. 그때 대리 달고 프로젝트 몇 개 낸 게 다 대박이 났었다고, 그때 참 좋았다고 전무 입으로 직접 들었어요. 사실 그때 좀 멋있을 뻔했잖아요. 자기 입으로 말하는데도 분위기에 취해서.
근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L전무는 자기가 선택해서 무선사업부로 간 걸까? 자신은 그게 잘 될 줄 알았던 걸까?' 물론 능력은 좋았겠죠. 왕년에 안 그랬던 사람이 어딨겠어요. 근데 그때 그 전무가 아니었으면, 천만 대 팔릴 게 오백만 대 팔렸을까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라는 책을 보고 한참 팀원들이랑 얘기했었죠. 주임님도 아시겠지만, 사실 힘 빼고 일하는 게 훨씬 어려워요. 다 같이 노력하는 분위기에서는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따라가게 되니까. 대신 언젠가 일이 잘 풀리면 내가 선택한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날이 올까요?.
결국 성공이라는 거, 우리가 선택하거나 만드는 건 어려운 거겠죠? 그걸 아니까 사람들은 어느 순간 노력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최악을 피하기 위한 몇 가지 요령과 선택들로 살아가는 거겠죠. 뭐 그것조차도 힘 빼기에 성공한 사람들 얘기인 거구요.
당신의 안전한 휴가를 위해 편지는 부치지 않습니다
주임님, 행복해지려면 뭐가 필요한 걸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휴가철 아닐 때 휴가를 가는 거, 직장이 있고 월급이 나오지만 퇴근하면 완벽히 잊어버리는 게 행복일까요.
그럼 나는 괜한 편지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임님의 안전하고 마음 편한 휴가를 위해서, 이 편지는 부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한옥마을의 낮고 낡은 담벼락 사이에, 스트레스는 모두 내려놓고 돌아오시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