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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찡 Oct 29. 2015

첫 경험

02. 생각없이 무언가를 해낸 적이 있나요


바야흐로 2014년.  마냥 전시장이 좋은 풋내기였다. 

뙤악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첫 회사에 입사한 나는 세계를 누비는 전시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화려해보이는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사무실에서 지겨우리만큼 paper work을 해야했단 걸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다면, MICE를 내 무대로 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시, 컨퍼런스 할 것 없이 엉덩이가 무겁도록 앉아서 컴퓨터와 씨름하며 일을 해야했다. 

미숙하고 거칠었던 그날들의 기억을 풀어볼까 한다. 


2014년 10월 

내가 가장 첫 행사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해외에서 바이어들을 섭외한 수출상담회였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 일을 어찌했나 싶다. 미팅 어레인지를 위해 참가 업체 명단을 받아 하나하나 전화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밭은 일정을 어찌 맞췄나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보 티를 내던 나는 그 벅참을 견디기 어려워 울고싶지 않아도 눈물부터 나왔다. 매일 속상했고 매일 억울했다. 벅참을 토해내다 우는 모습을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직장인으로서는 빵점자리 사원이다. 회사가 놀이터도 아니고 상사가 내 친언니도 아닌데 쉽게 감정을 노출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꾹 참았다가 화장실 가서 펑펑 울곤했는데 소변 볼 시간도 없어지자 그냥 비집고 눈물이 났다. 


현장에 가니 업체도 나를 찾고 이것저것 내게 물어보느라 어지러웠다. 바이어는 더더욱 통제가 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자리를 이탈하는가 하면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세르비아에서 온 한 바이어는 만찬장에서 건배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엔 늦잠을 자서 셔틀을 타지 못했다.  당시 행사장은 일산 KINTEX였는데 숙소는 염창동에 위치한 한 호텔이었다. 한국말 하나도 못하는 외국인 바이어를 택시를 태워서 염창동에서 일산까지 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호텔에 전화해 바이어를 깨워달라고 얘기했고, 호텔 프론트 직원이 콜택시를 예약해주었다. 그리고 바이어를 택시에 태워 일산까지 오게 했는데 그날 택시기사님과 나는 긴밀한 통화를 나눴다. 그러더니 몇시간 후 본인은 배가 너무 아파서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다.   점심도 엉망이고 아무래도 탈이 난것 같다면서 만찬장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상사에게 보고했다. 가능하면 참석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재차 요청하라기에 바이어에게 물었더니 그가 화를 버럭 내면서 "내가 '백인 남성' 이니까 나를 앉혀놓으려고 하는거냐? 내가 당신들 꼭두각시냐?" 라고 했다. 잔뜩 욕을 먹은 나는 다른이로 대체할 인원을 구하자는 상사의 말을 듣고 그를 호텔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 바이어는 나중에 자기 괜찮아졌다며 만찬장으로 향했고 무대 위에서 '강남스타일'을 추고 폭탄주를 말았다



2015년 7월 

PCO로서 현장을 나갔던 건 여러 차례있었지만 큰 심포지엄 현장을 총괄하는 것은 7월 행사가 처음이었다. 

메르스 여파를 정면으로 맞았던 터라 기조 강연 연사가 교체됐고, 꽤 많은 해외 강연들이 취소 됐다. 그랬기 때문에 현장 2주를 남겨두고 새판을 짜다시피 했다. 때마침 나는 대상포진에 걸려 그 수많은 취소와 새로운 프로그램 짜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장비를 뺏다 넣었다 현장 제작물을 신청했다 취소했다. 연사들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몸은 처음 겪어보는 고통으로 가득한데 진통제와 항바이러스제를 먹고 행사하는 기분은 정말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정신없이 현장의 첫날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아침 여섯시에 출근해서 자정가까이에 퇴근하는 시간을 보냈다. 사실 현장 총괄은 매 시간 시한 폭탄을 안고 사는 일이다. 나는 고작 풋내기인데 세팅이 제대로 되어있는것에 대한 감을 잡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고마운 스승들

첫 회사에서는 K선배가 좋은 롤모델이 됐다. 그녀는 전시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밤새 달려도 거뜬한 강력한 체력과 꼼꼼한 성격은 거친 전시장을 주무르기에 아주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각적이었다. 웬만한 디자이너보다 디자인을 잘했다. 브로슈어를 뚝딱뚝딱 만드는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녀를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메일 형식을 따라하는 건 물론 서체까지 따라했다.  내가 눈물 지으면 토닥여주고 안아주고 함께 누군가를 욕해주고! 그런 인간적인 면도 많이 있었다. 그녀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죽-여 버렷" 이런 말은 스트레스를 금방 날리는데 도움이 됐다.

S차장님은 컨퍼런스 현장의 여신이다. 10년에 노하우가 집약된 엑기스를 나에게 선사하셨다. 손도 빠르고 일처리도 빠르셔서 느려터진 나는 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차장님은 좋은 선생님이기까지 하셔서 차근차근 기초부터 다져주셨다. 그 경험은 첫 현장 총괄을 맡은 내가 버벅대는 것을 줄여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도움을 주는 많은 분들이 있어 이 바쁜 가운데도 일정을 소화해낼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무언가를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그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든다. 



내 첫 경험들은 미숙하고 볼품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정에도 행사들을 해냈다. 그 기억이 오늘도 나를 일하게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고 다행히 행사도 잘 마무리됐다. 중간에 쓰러지지 않고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나의 11월에도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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