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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찡 Sep 08. 2016

여름 정산

4.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오후 11시 40분. 

월요병이 스멀스멀 찾아올 법한 일요일 밤이다. 이상하게 메일함을 열어봐야할 것 같아서 아웃룩을 켜버렸다. 

주말에 메일 여는 습관은 왜이렇게 고쳐지지 않나 모르겠다. 나는 연락을 기다리느라 몸이 달은 사람처럼 손톱을 깨물다가 결국 보고야 말았다. 따끈따끈하게 1분 전쯤 도착한 메일이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반갑지 않은 메일이다. 역시나 영국 출신의 주제강연 연사가 자전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심포지엄에 올 수 없다는 메일이었다. 두둥. 당황할 새도 없이 나는 상부에 보고를 마쳤고 주요 위원분들에게도 월요일 기념 선물이라도 되는 양 따끈따끈한 메일을 전했다. 다른 분을 섭외하실지 아니면 취소된 채로 진행하실 지는 위원분들의 결정에 달렸다.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났었는데 벌써 아스라이 먼 일이 되어 버렸다.

7월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의 일이었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여름이 갔다. 너무도 뜨거웠던 올 여름. 나의 여름을 정리해본다.




뜨거운 현장이 익어가는 계절 

이육사 선생님은 시 <청포도>에서 그 고장의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셨다. 그 묘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을의 전설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고! 하늘이 꿈을 꾼댄다!

나에겐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선생님의 묘사와는 다르게 내 7월은 Deep Purple의 <April>의 분위기와 더 가까운 것 같다. 잔인한 시간!  한 마디로 현장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https://www.youtube.com/watch?v=toonXjN2wTM
Deep Purple - <April> #Nowplaying


그래, 여름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비가 와도 쌀쌀하지 않고 오히려 습기 가득한 후덥지근한 느낌마저 든다. 올 상반기 내내 7월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근 한달동안 해야할 수많은 야근과 현장 준비 때문이었다. 현장을 향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준비기간 내내 영어듣기평가에서 한 문제를 틀리면 책상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을 하는 민감한 학생처럼 굴었다.  매년 7월에 치뤄지는 심포지움을 맡은지 벌써 2년이 됐다. 지난 2년동안 한 해가 마치 7월에 끝나는 기분을 받곤 했다. 시험기간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매일 하는 것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대로 진행되는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연사들은 다들 답이 제각각이고, 귓잔등을 때리는 서툰 말들을 지워내지 못해 혼자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같은 질문을 수 백번 반복하는 많은 참가자들의 전화에 응대하는 건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진이 빠져서 신나지 않고, 지치고 울컥하는 일들이 잦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랬다, 저랬다 마음이 바뀌어서는 그 때가서 수정을 해야하는 일들이 횡행했다. 혼자 외로운 전투를 계속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외로움 속에 빠져들기 아주 좋은 핑계였다. "그냥 잊어버려요." 라는 말은 이미 상처받은 내 영혼을 달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럴듯한 2년차 징크스 같은 것도 온 것 같았다. 모든게 하기 싫었다. 


그러나 일은 내가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남은 일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심포지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 확정을 해야했고, 책도 만들어야 하고, 논문집도 만들어야 했다. 프로그램이 워낙 많기 때문에 지도도 만들어서 배포해야한다. 각종 지원금을 받는 기관들 마다 그 양식에 맞게 보고도 해주어야 했고 닥쳐서 수정해야하는 일들도 참 많았다. 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깔아뭉개는 듯한 느낌을 자주 들게했다. 하루가 여러 번 쌓였고 나는 현장에 서 있었다.

시간은 화살처럼 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현장이었다.

 

그래도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았다. 

현장에서의 시간은 준비한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났다.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겨우 한달도 채 되지않아 어느 부분은 잊어버릴 정도로 아득해졌고 사소해졌다. 이번 7월 행사는 내가 총괄을 맡았던 두 번째 국제회의였다. 나는 너무 미숙했고 당황했으며 내 눈에는 부족한 면들이 더 부각되어져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 같아 힘든 시간이었다.  보완할 점들 분명 많았다. 연사들을 챙기는 세심함이나 현장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기나 가구 등을 한번 더 챙겼어야 했고 컨벤션센터에서 제 때 답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 요구를 해야 했고, 답사할때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다. 그리고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관사나 협력사의 성향을 파악하여 일정을 잡았어야 했다. 여러 부분에서 세심함과 꼼꼼함이 부족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도 칭찬해줄만한 일들 또한 많았다. 일단 잘 끝냈잖아? 등록도 많이 됐고, 심포지엄도 흑자가 났고 BK21 국제회의 기준도 잘 충족했다.내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행사를 잘 치러냈다는 자체만으로도 나 스스로에게 칭찬할 이유가 충분했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큰 성과는 곁에서 많이 도와주는 분들이 계셨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성과와 스스로의 성장보다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 가장 감사했다. PCO란 직업을 가지고 몇 차례 행사를 하면서 늘 드는 생각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혼자 이 일을 다 해야했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다른 직업을 알아봤을 것이다. 정말 나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바쁠 때 전화통화를 대신 받아주는 운영요원부터 각 부분마다 도와주는 손길과 노력이 없었다면 사흘 간 단 1분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을 것이다. 미숙함을 힐난하기보다 선뜻 나서 도와줌으로써 더 큰 깨달음을 얻게하는 동료들이 없었다면 나는 매일 무너졌을 것이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가끔 억울하게 내 잘못이 아닌 일에 혼이 나고 비난을 받아도 호텔방에 들어가서 껴안고 펑펑 울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 아닐까. 



뜨거웠던 여름을 뒤로 하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하늘도 껑충 높아졌고 그렇게 더웠던 나날들이 한낱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갑자기 서늘해졌더라. 뜨겁게 보냈던 올해의 여름이 막상 마무리 된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찬 바람이 불자마자 내년 심포지움을 위해 또 바쁘게 보내고 있다. 내년 7월에 오실 반가운 손님이 더 잘 준비된 행사 그 자체일지, 아니면 더 성장한 나의 모습일지 알 수 없다만 올해보단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반딱하게 닦인 은쟁반에 보송보송하다 못해 까슬까슬한 모시 수건을 잘 다려놔야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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