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um Physics, courage and God
오랫동안 과학계는 우주의 기본 단위를 원자나 더 작은 소립자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의 등장 후, 현실(reality)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작은 단위는 물질(matter)이 아니라 정보(information) 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전자와 광자 같은 소립자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물리적 존재와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가 보기 전까지 그들은 특정한 위치나 속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파동 함수라는 확률 분포 형태로 존재한다. 즉,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중첩(superposition)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동전을 던지기 전까지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모르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동전이 실제로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가진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입자의 상태는 측정(또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전까지 결정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정보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정보가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결과물일 뿐이다.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입자들은 공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공유한다. 우리가 하나의 입자를 관측하는 순간 다른 입자의 상태도 즉시 결정된다. 마치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처럼 작동한다.
현실은 단순한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정보가 상호작용을 통해 처리되고 해석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 (construct), 더 극단적 표현을 쓰자면 허구 또는 환상과 다를 바 없다.
현실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물질이 아니라 정보라면, 우리는 하나의 시뮬레이션 속에 있는 것일까? 사실 그게 중요한가? 시뮬레이션 안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삶과 죽음, 이 두 가지밖에 없다. 매트릭스 영화처럼 빨간약을 먹고 시뮬레이션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 않은가.
양자역학에서 제시하듯이..
1. 현실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다가 상호작용이 발생할 때 형성된다면,
2. 현실이 관찰, 의도, 상호작용, 관계에 반응하여 형태를 갖춘다면,
3. 우리의 행동이 현실을 형성, 결정하는 입력값과 같다면,
우리는 단순한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 창조자라는 뜻이 아닌가?
우리의 모든 선택은 하나의 양자 측정(quantum measurement)과 같으며,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를 확정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용기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이 많다. 용기는 "머릿속의 생각"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용기는 "현실에서의 행동"이어야 한다. 달려오는 지하철을 보고도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줄 용기, 좋아하는 이성에게 고백을 할 용기,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 용기가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실현될 때, 현실의 결과를 바꾼다.
용기란 두려움이나 불확실성을 의식적으로 거스르고,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행위다. 즉 행동하지 않는 것 (= 두려움에 의해 행동하는 것)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대의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에서 기존의 확률파동 (default probability wave)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 내가 바라는 결과를 스스로의 행동과 결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을 가리고 다트를 던지는 것처럼.
용기 있는 행동은 현실을 직접 선택하는 행위다. 마치 "나는 이 현실을 선택한다"는 선언과 같다. 만약 내가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고 열정을 따르는 길을 선택한다면, 그건 단순한 커리어적 변화가 아니다. 현재의 정체된 현실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길을 창조한 것이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와 가슴의 역할에 대해서
머리는 논리와 합리성, 두려움과 리스크, 후회와 걱정을
가슴은 직관, 진정성, 진심, 내면의 깊은 진실, 그리고 용기를
담당한다고 표현한다. (과학적 표현은 아니지만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
용기의 반대인 두려움은 사실 자아(ego)가 현상태를 유지하고자 만들어 난 환상과 같다. 지나고 보니 두려울 필요 없었던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와 자식관계, 부부관계 간에서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싶지만, 머리는 "부끄럽다", "말 안 해도 알 거다"라는 논리를 세워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은 머리가 가슴과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로도 너무 잘 이해한다. 우리는 가슴이 시키는 행동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보상을 준다는 사실을 안다. 가슴이 시키는 열정을 따라가는 것이 더 큰 보상을 준다는 사실을 알지만, 머리는 두려움이란 무기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페이팔과 팔란티어의 공동 창업자인 피터 틸(Peter Thiel)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패배하게 된다.
이 문장은 피터 틸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패배한다고 생각하는(즉, 믿는) 순간, 이미 패배를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직접 이 트윗에 답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스페이스 X와 테슬라 둘 다 성공할 확률이 10%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겉으로 보면, 일론 머스크는 피터 틸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실패를 예상한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시도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피터 틸의 논리에서는 단순히 "성공할 것"이라고 믿어도 결과는 불확실하다. 반면, 일론 머스크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전했다.
즉, 그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을 감수하고도 행동하는 더 큰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단정 짓기 전에, 믿음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 자신을 믿는가? 내 회사를, 국가를, 인류를, 아님 신을 믿는가?
나 자신의 요리실력을 믿어 식당을 차리는 자영업자도,
조직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믿고 큰 규모의 회사를 차리는 기업가도,
인간을 화성에 보내겠다는 인류의 미션을 가지는 일론 머스크도,
어색하지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하는 우리도,
더 나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믿음 없는 용기는 무모함이고, 용기 없는 믿음은 소극적 신뢰에 불과하다.
용기 있는 행동을 더 많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유동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정보기반의 현실을 접하게 된다. 두려움은 현실의 가능성을 붕괴시키지만, 용기는 가능성을 확장한다. 즉 마음은 양자장과 연결되는 인터페이스 (interface)다. 용기를 따르는 것은 현실이라는 시뮬레이션을 해킹하는 것과 같다.
현실성과 합리성, 리스크과 두려움을 가지는 건 우주의 무한한 확률 분포의 가능성을 고작 포유류 중 하나인 인간이 두뇌라는 작은 CPU로 계산하는 것 같다. 수동적 관찰자로 산다는 건 현실이라는 시뮬레이션에서 NPC (Non-Player Character)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해진 입력값과 출력값으로만 기계적으로 사는 게임 속 캐릭터 말이다.
종교의 종류를 떠나서, 신을 믿는 행위는 신에게 의존한다는 뜻이다. 단순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려놓고 신에게 완전히 항복 (surrender)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믿음이 약하고, 이를 행할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음과 용기를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대상이 신이다.
어찌 보면 시뮬레이션의 치트키와 같다. 현실이라는 시뮬레이션 안에서 중첩된 무한의 가능성에서 용기 있는 행동을 해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확률이 증가한다. 용기가 없다면 그 행동이 가져다 줄 결과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뜻으로, 결국 믿음이 없으면 행동하지 못한다.
믿음과 용기가 없다면, 신께 요청해 보는 건 어떨까? 신을 믿지 않는다면 시도해 보라. 그것조차 용기 있는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