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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종찬 May 21. 2019

블록체인: 자유와 검열 사이

Between Freedom and Censorship

영화 해리포터, 할로우맨, 반지의 제왕에는 인간이 투명해지는 스토리가 나온다. 투명망토를 선물 받은 해리는 금지된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고, 투명해진 할로우맨은 여성 동료를 성추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며, 은신의 힘을 가진 절대반지를 소유한 자는 온갖 유혹과 문제를 직면한다. 물론 영화가 설정한 스토리일 뿐이지만, 완벽한 익명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


해리포터, 할로우맨, 반지의 제왕


인간은 사회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가 공존한다. 사회적 자아는 스스로 설계한 공개적인 모습, 즉 타인의 자아이고, 본질적 자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본모습이다. 부끄러움, 도덕/사회적 잣대, 타인의 평가와 같은 요소가 없으면,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자유로울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와 개인 사이 스펙트럼 안에서 접하는 관계에 대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본질적 자아는 자유에 이끌리지만, 사회적 자아 (=타인의 자아)는 검열/컨트롤에 이끌린다.


자유에 가까워질수록 개인의 본성에 집중하고, 검열에 가까워질수록 집단의 역할에 집중한다. 무정부주의와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의 본성만으로 사회와 경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고,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는 집단의 역할을 위해 모든 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체제다. 우리는 시대정신에 따라 이 두 극단의 체제 사이 어딘가 사회를 구성한다. 철저한 익명성은 사회적 자아를 완전히 배제하고, 본질적 자아를 극대화한다. 자유를 극대화하고, 검열을 극소화한다는 의미다. 


자유라는 명분의 기술

사회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따라서 '나'의 자유와 동시에 '타인'의 검열을 저항하는 명분으로 탄생한 기술은 세상을 바꿀 만큼의 사회적 파급력을 지닐 수 없다. 극단적 자유 그 자체가 우리가 설계해놓은 사회적 역할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의 자유를 위해 지적재산 (intellectual property)이라는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토렌트는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제도화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했고, 대부분 음란물이나 크랙 소프트웨어 공유에만 쓰인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의 가치를 탈중앙화를 통한 검열 저항성 (Censorship-resistance)과 익명성 (anonymity)이라고 말한다. 토렌트와 동일한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적 접근으로는 어떠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문제는 현실에 존재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 역시 현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특정 철학을 가지고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겠다면, 그 철학은 반드시 현실에 대입되어야 한다.


필자는 블록체인 (=비트코인)의 가치가 검열 저항성과 익명성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오히려 정반대다. 검열 저항성과 익명성은 블록체인 고유의 가치를 빛내는데 방해한다. 블록체인의 시작인 비트코인은 검열을 저항하지도, 익명성을 제공하지 않도록 디자인되어있다. 좀 더 알아보자.


비트코인의 공개원장과 가명성

비트코인의 모든 거래내역은 공개되어있다. 어떤 주소에서 얼마의 금액이 어디로 옮겨갔는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비트코인을 통한 범죄가 일어나면, 주소를 따라가 소유주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암호화폐 로비스트 그룹인 Coincenter가 암호화폐 제도화를 위해 피력하는 강력한 주장 중 하나다. 이들은 모든 원장 내역이 공개된 비트코인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주 바보 같은 짓이라며 정부를 설득한다.


불법 마약거래 사이트인 실크로드의 창업자 로스 울브리히트가 잡힌 것도, 그의 비트코인을 몰래 훔친 FBI 요원이 걸린 이유도 비트코인의 공개된 거래내역 때문이다. 이러한 원장의 공개성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암호화폐를 통한 불법 다크 웹 거래가 전부 익명성을 제공하는 모네로 (Monero)나 대시(Dash)로 이루어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비트코인의 공개원장은 책임 (accountability)의 역할을 한다.

책임은 나의 개인적 자유와 사회 속 타인의 자유를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할 수는 (capable) 있지만, 사회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accountable)한다. 자유방임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는 과연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냐는 본질적인 질문이 숨여져있다. 빈부의 격차 논쟁 역시 부의 격차를 철저하게 개인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와 모든 것을 사회가 책임질 것이냐의 차이다.


비트코인은 공개원장을 통해 책임의 소재를 개인과 사회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비트코인 원장은 거래의 시간과 내용을 기록하고 이는 변조되지 않는다. 자유와 검열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만약 비트코인 또는 암호화폐의 거래내역과 역사를 완전히 익명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자유와 검열, 개인과 사회라는 스펙트럼에서 개인의 자유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고, 그만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진다. 암호화폐에 관심 있다면 이 스펙트럼을 잘 이해해야 한다.


비트코인은 가명(pseudonymous) 시스템이다. 익명(anonymous)이 아니다. 원장의 공개성과도 연관이 있지만, 가명 시스템에선 특정 주소에 내 개인 아이덴티티가 연결만 되어있지 않을 뿐, 공개된 거래내역을 통해 나의 아이덴티티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전체주의적 검열의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자유에 따른 책임 부여가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다.



자유방임적 이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정부가 무조건 검열을 하고 싶어 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유의 중요성도, 검열의 위험성을 모두 인지하고 있고 이 둘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게 정치와 법의 역할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주요 선진국의 중앙은행 (또는 금융감독원)은 일정 금액 이하의 거래내역을 영장 없이 검사하지 못한다. 자금세탁방지(AML)과 테러자금조달방지 (CFT)를 위해 고액 결제의 경우에만 확인이 가능하다. 소액까지 모두 검사하는 경우 검열의 영역이라고 법으로 지정해놓은 것이다. 실제로 중앙은행들은 디지털 화폐(CBDC)를 논의할 때 자유와 검열 사이의 밸런스를 기술적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한다.


인터넷 실명제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위헌 선고를 내렸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극단적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터넷 포탈과 서비스들이 익명이 아닌 가명 기반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고다. 내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서비스 가입 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입력하기 때문에 악플에 대한 책임 (인신공격/명예훼손)을 질 수 있는 구조다. 즉 가명성이야 말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타인에게 피해가 갔을 경우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술을 통한 세상의 변화는 그 기술이 현실을 반영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할 때 이루어진다. 현실을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사토시 나카모토에 경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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