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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음 Jun 13. 2024

6. ADHD가 쏘아 올린 자아탐구

 ADHD라는 도구로 나를 반추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세번째 정신과 진료가 있었다.


병원 문 앞에 다다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주기적으로 나의 마음을 상담할 수 있는 사람과 장소가 있다는 안정감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나의 나약함과 무능을,  의학이라는 수단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는 '증상'으로 정의하면서 나는 새로운 희망과 닿고 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상담실 문을 열고 선생님께 인사를 건네는 내 목소리는,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의 것과는 달랐다.

울음을 꾹 참으며 꾸역꾸역 증상을 털어놓던 그 날의 내가, 아주 오래된 일 같았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언제나와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나를 맞아주셨다.


내 기분과 상태에 상관 없이, 늘 일관적인 태도의 의사 선생님을 마주하며 나는 제주 바다 위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을 떠올렸다.

매우 뜬금 없는 비유인 것 같지만, 제주 동쪽을 사랑하는 내게 성산일출봉은 그런 존재다.

날씨가 어떻든, 바다가 어떻든, 비바람이 불든, 풍랑이 몰아치든.

늘 같은 형태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서 위안을 주는.

(제주 동쪽과 성산일출봉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감정이 또 다시 '울'의 굴곡을 파고들어가더라도, 이 병원과 의사선생님은 건재하실 터이니.. 그 자체로 조금 든든하달까.


상담 내용은 이제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어떠셨어요?

- 불안도는 많이 좋아졌는데, 집중력은 기복이 있었던 것 같아요.

- 부작용은 없었나요? 식욕부진이라든가. 두근거림, 두통, 불면 같은.


다행히 약을 복용하는 내내, 내가 체감할 정도의 부작용을 느끼지는 못했다.

약이 조금 듣는 날이 있는 것 같고, 잘 듣지 않는 날이 있는 것 같은 기복은 있었지만.


선생님은 지금 먹는 약들이 잘 맞는 듯 하니, 복용량을 조금 올려도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지금까지는 약이 잘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일반적인 복용량보다 극히 적은 용량을 처방해왔으니 이제는 나한테 좀 더 적합한 용량을 찾아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세번째 진료 결과, 매일 항우울제 20mg,  ADHD약은 20mg을 복용해보는 것으로 처방이 내려졌다.

복용기간 또한 1주에서 2주로 늘었다.


선생님께선 책도 한 권 추천해주셨다.

ADHD의 인지행동치료에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나는 지난번 보다 조금 더 도톰해진 약봉지를 들고,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했다.






요즘 내 최고의 관심사는 단연 ADHD이다.


우울증이 내 상황 때문에 생긴 병이라면, ADHD는 내 근원과 더 맞닿은 진단이기 때문이다.

여러 정보들을 찾아보며, 내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모자람'들이 소아 ADHD의 흔한 증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머릿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어깨 너머로 알게된 '성인 ADHD'의 전제는 이렇다.

'성인 ADHD'는 성인이 돼서 새로이 생기는 병이 아니라, 소아 때부터 있던 것이 성인이 돼서야 발견되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한다. 그래서 ADHD인지 진단하는 기준에는, 12세 이전의 히스토리를 추적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이러한 전제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린시절을 조금 더 면밀히 반추하는 시간들을 가졌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비교적 선명한 편이라(특정 장면은 정말 자세히 기억하고 있기도 한다) 어린 나를 되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난 글에서 언급된 어린시절의 모습들 (산만하다, 뒷정리에 소홀하다, 잠이 많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지각을 면한다 등등) 이 외에, 내 기억에 남은 몇 개의 장면을 더 고해해보려고 한다.


급식 우유를 제때 먹지 못하고 책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상한 우유가 터져서 엄마한테 혼났던 일
책상 걸이에 걸어놓은 책가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반 아이들이 발로 차고 다녔던 일, 종례시간에 그 가방을 교탁 밑에서 발견했던 일
다른 친구들이 다 잘 하는 '만들기'를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 (이건 여전히 잘 못한다)
물건을 잘 고장내고 망가뜨려서 "너는 손에 망치가 달렸냐"며 부모님께 꾸중을 받았던 일
청각이 민감하고, 소음에 유독 깜짝깜짝 잘 놀랐던 순간들 (이것 또한 여전히 그렇다)
멍이 잘 드는데 어디서 다쳤는지 기억을 못했던 수많은 일들, 행동이 느리다고 놀림을 받았던 일 등등


어린시절, 나의 '특이함'이나 '부족함'이라고 칭해졌던 일련의 패턴들이 소아 ADHD의 특징으로 설명돼 있음을 목도했을 때의 충격이란.


특히나 소아 ADHD의 특징들 중 '소근육 발달이 더디다'라는 대목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무슨 반전영화를 본 것마냥 소름이 돋았다. 내 동생이 요즘도 나를 꾸준히 놀리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서다.


- 언니는... 소근육 발달이 좀 덜 된 것 같아. 어릴 때보단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단순히 손재주가 부족하고 손이 야무지지 못하다고만 여겼던 나의 '모자람'이 ADHD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니. 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쳤던 컴플렉스가,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다니.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 왜 이걸 이제야 알았지?


지금껏 나는 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씁쓸함이 가장 먼저 밀려들었다.

끊임없이 나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나를 들여다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가에 대한 뼈아픈 고찰. 그러면서도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한 살이라도 젊은 날에 나를 제대로 알아갈 도구(Tool) 하나를 발견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생각도 많고, 잡념도 많고, 충동적이고, 마음도 수시로 바뀌는 나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타인을 대할 땐 늘 긍정적이고 밝은 면들을 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내 내면은 언제나 복잡했다.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왜 이런 것들을 못하지? 뭐가 잘 못됐지?

감정기복이 하락하는 사이클이 올때마다, 나는 내 존재를 그렇게 파먹으며 공허함을 채웠다.


- 너는 대체 뭐가 문제니?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답한 적이 없었다.

나도, 답을 몰랐으니까.


만약 지금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이제 나는 조금은 나은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사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은 아직 초반부를 읽는 중이다.

썩 재미가 있진 않지만, 나를 알아가는 기분으로 읽고 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지행동 치료에 대한 지침을, 하나씩 실천해 봐야겠다.

루틴과 습관이 제일 어려운 내게, 결코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백번을 다 이길 수는 없겠지만, 가끔 지더라도 위기로 인해 흔들리거나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진 ADHD를 인지한 이후,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나를 바라보는 시각도, 시점도.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방법도.

나를 탐구하는 방식도 말이다.


ADHD를 알아가며, 나를 배워가고 있다.

진단의 시간은 생에 비하자면 아주 찰나지만, 그 찰나로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존에 내가 가졌던 세계관을 조금 무너뜨리고, 다른 세계관으로의 확장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ADHD로 시작된 나의 자아탐구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틈틈이 책에서 읽은 ADHD를 위한 지침들을 차차 수행해보고, 그에 대한 기록 또한 꾸준히 남겨볼 생각이다.


<이것은 우울과 회복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이 일련의 글들이, 결국엔 다른 제목으로 묶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 그것은 꾸준히 글을 쌓은 다음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 미술시간에 목판화를 하다가 조각칼에 손을 크게 베어 피가 철철 난 적이 있었다.

그 후 한동안 조각칼은 커녕 커터칼도 제대로 만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본다.

여전히 칼질에 서툰 지금의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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