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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의 천국에서 ESG 선도국으로 작은 실천이 만드

by 심준규 Jace Shim

홍콩에서 마주한 작은 변화, 큰 깨달음


2024년 여름, 홍콩 출장에서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다. 호텔 체크인 후 객실에 들어섰을 때,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무료 생수병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당황했지만, 각 층마다 설치된 정수기 앞에서 모든 상황이 명확해졌다. 정수기 전면에 표시된 'Bottle Saving' 문구와 함께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절약된 플라스틱 병의 수를 보는 순간,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닌 환경을 위한 적극적 실천임을 깨달았다.


처음엔 불편함으로 느껴졌던 변화가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바뀌었다. 개별 호텔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2024년 4월 22일부터 홍콩 전역에서 시행된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사용 금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홍콩 정부는 약 2만 개의 식당, 소매점, 호텔,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빨대, 수저류, 접시, 컵, 포장용기 등 9가지 유형의 제품이 규제 대상이며, 6개월의 적응 기간 후 위반 시 최대 10만 홍콩달러(약 1,700만원)의 무거운 벌금이 부과된다. 강력한 정책은 단순한 규제를 넘어 시민들의 환경 의식을 높이는 교육적 효과까지 가져오고 있다. 내가 경험한 호텔의 정수기 시스템처럼, 규제와 함께 시민들이 환경 보호의 실질적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장치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실제로 홍콩 거리를 걸으며 관찰한 바로는, 많은 시민들이 개인 텀블러나 재사용 가능한 용기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카페나 식당에서도 종이나 대나무 등 친환경 소재로 만든 대체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태도가 매우 긍정적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전 세계적 플라스틱 규제 확산과 국제 공조 체제


해외 주요국들의 움직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영국 정부는 2022년부터 모든 정부 부처와 관련 기관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사용을 전면 금지했으며, 공공부문에서 민간부문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시는 2019년부터 공공기관의 플라스틱 생수병 구매를 차단했고, 이후 캘리포니아주 전체로 유사한 정책이 확대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더욱 앞서 나가 2021년부터 10가지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에 대한 포괄적 규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회원국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개별 국가 차원의 노력을 넘어, 국제사회는 플라스틱 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범지구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법적 구속력을 갖춘 플라스틱 국제협약 체결을 위한 글로벌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며, 2024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에서는 인류 공동의 과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논의가 이어졌다. 회의에서는 플라스틱 전주기 관리, 생산량 감축, 재활용 촉진 등 포괄적인 접근 방안들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협력 체계 구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플라스틱 오염은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문제이기 때문에, 각국의 경제적 발전 수준과 기술적 역량을 고려한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단순히 규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 문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국제협약이 최종 체결되면 우리나라도 이에 따른 국내법 정비와 정책 개선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정책 체계를 미리 구축해 나가는 상황이 중요하다. 국제 규범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환경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현실-정책 일관성 부족과 그 배경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일회용품 규제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환경부는 최근 카페, 식당 등에서의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렸고, 플라스틱 빨대 금지 유예기간을 무기한 연장하는 결정을 내렸다. 특히 2021년 11월 24일부터 시행된 카페 내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는 업계의 반발과 실무적 어려움을 이유로 2023년 11월 전면 철회되었다. 환경 정책 수립 과정에서 현장의 목소리와 실행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책 후퇴의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소상공인들의 경제적 부담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친환경 대체재의 단가가 기존 일회용품에 비해 2-3배 높은 상황에서, 이미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자영업자들에게는 추가적인 비용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친환경 제품의 품질이나 사용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도 정책 철회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성급하게 규제를 도입했고, 업계와의 소통이나 대안 마련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친환경 대체재의 공급망 구축이나 가격 안정화 방안 없이 규제만 먼저 시행한 점은 명백한 정책 실패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환경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크게 훼손되었다.


한국환경공단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국내 일회용품 배출량은 약 90만 톤으로 집계됐다. 구체적으로 환산하면 축구장 크기의 쓰레기 매립지가 매년 90개 이상 새로 생겨나는 것과 같은 규모다. 더욱 심각한 점은 매년 수치가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특히 배달 음식 문화의 확산과 함께 포장용 일회용품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시민사회와 기업의 자발적 환경 실천


정부 정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와 기업 차원에서는 희망적인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회용품 제로 챌린지' 캠페인이 공공기관, 기업,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매월 10일을 '일회용품 없는 날'로 지정하여 전국민적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 '10'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날짜가 아니다. '1'회용품의 '0'(제로)화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시민들이 쉽게 기억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특히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ESG 경영 확산이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전자는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일회용 컵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개인 텀블러 사용을 의무화했으며, LG그룹은 임직원들에게 친환경 제품을 지급하여 일상적인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사업장 내 일회용품 사용량을 전년 대비 50% 이상 줄이는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수립했다.


국내 관광업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일부 리조트와 호텔에서는 투숙객들에게 재사용 가능한 물병을 제공하거나, 친환경 어메니티를 적극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주도의 한 리조트는 객실 내 생수병을 없애고 대신 각 층에 정수기를 설치하여 연간 수십만 개의 플라스틱 병을 절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변화는 국내 관광객은 물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점은 개인 차원에서도 환경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스타일이 확산되고 있으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친환경 실천 사례들이 활발하게 공유되고 있다. 정부 정책의 부재를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로 보완하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2025년 가을, 새로운 전환점을 위한 정책적 과제


2024년 여름 작성했던 당시의 우려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와 해외 선진국 간의 정책적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더욱 강력하고 일관된 일회용품 사용 규제 정책을 마련할 때다. 성공적인 정책 시행을 위해서는 기업과 소비자가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합리적 유예 기간 제공, 효과적인 홍보와 교육을 통한 인식 개선, 그리고 무엇보다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필수적이다.


정책 실패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보다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친환경 대체재의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정부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대량 구매를 통한 단가 절감, 친환경 제품 개발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소상공인 대상 구매 보조금 지급 등의 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 또한 친환경 제품의 품질 개선과 표준화를 위한 연구개발 투자도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다. 일방적인 규제보다는 환경 보호의 필요성과 개인의 실천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교육과 캠페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홍콩의 'Bottle Saving' 시스템처럼, 개인의 친환경 실천이 실제로 얼마나 큰 환경적 가치를 창출하는지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치들을 도입하는 방법도 효과적일 것이다.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는 ESG의 환경(Environmental) 분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기후변화 대응, 자원 효율성 향상, 생태계 보전 등 광범위한 환경 이슈와 직결되어 있으며,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기업들에게 있어서도 일회용품 사용 규제는 단순한 비용 증가 요인이 아닌,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필수 요소로 인식되어야 한다.



K-ESG 선도국을 향한 비전과 실천 방안


ESG는 결코 거창한 구호나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카페에서 텀블러 사용하기, 장 볼 때 에코백 챙기기, 배달 음식 주문 시 일회용 수저 거절하기 등 일상 속 작은 선택들이 모여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홍콩 호텔에서 경험한 정수기 앞의 'Bottle Saving' 카운터처럼, 개인의 작은 실천이 얼마나 큰 환경적 가치를 창출하는지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이미 K-콘텐츠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K-ESG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의 모범 사례를 전 세계에 제시할 차례다. 우리나라의 강점인 IT 기술과 제조업 역량을 활용하여 친환경 대체재 개발과 보급에 앞장설 수 있다. 또한 빠른 사회 변화 적응력과 집단적 실천 문화를 바탕으로 환경 정책의 성공적 정착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정부, 기업, 시민 모두가 하나 되어 환경 보호에 앞장선다면,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ESG 선도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03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이라는 국가적 목표와 연계하여,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를 포함한 포괄적인 환경 정책 체계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단순히 환경 보호를 넘어 새로운 산업 창출과 일자리 확대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의미 있는 도전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환경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들의 에너지와 창의성을 정책 수립과 실행 과정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는 환경 문제를 단순히 규제나 의무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들의 참여를 통해 보다 혁신적이고 실효성 있는 환경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가을,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시작할 때다. 플라스틱의 천국에서 벗어나 진정한 ESG 선도국으로 나아가는 여정, 바로 지금부터 함께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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