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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13. 2022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수잔나 클라크의 고딕


말에는 힘이 있다. 문자는 암시가 될 수 있다. 오컬트 신봉자는 아니지만 언어와 문자를 엮어 만든 주술이 존재할 수 있다 생각한다. 별 것 아닌 감상문들 조차 비문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철 지나고 촌스러운 나무위키식 취소체, 싸구려 오독이 혐오로 변신하는 것은 얼마나 쉽나.

언어나 문자가 단지 지속적인 체적 體積만으로 다른 차원의 힘을 소환해낼 수 있을까?

수잔나 클라크의 판타지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은 근원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조나단은 해리 포터가 아니며 미스터 노렐도 간달프가 아니다. 이 작품은 ‘마법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예술, 광기, 혁명,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힘에 관한 이야기다. 




19세기 초 영프 전쟁 기간, 영국에는 직업군으로서의 마법사가 존재한다. 보수적 신사로 구성된 이 협회의 회원들은 과거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마법에 관해 토론한다. 간단한 주문조차 시전 하지 못하는 동호회원에 가까운 일반인들이다.

‘레이븐 킹’이라는 전설적인 마법사로 대표되는 ‘영국 마법’은 영광과 공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열정적인 회원 ‘세군두스’는 위대한 마법이 종적을 감춘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계기로 진짜 마법을 행할 수 있다는 은둔 학자 ‘길버트 노렐’의 존재가 거론된다.

영국 내 거의 모든 마법서를 독점한 노렐은 수집욕만큼 독선적이다. 협회 가입은커녕 오직 자신만이 영국 마법사로 남길 바란다.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닌 사회적 권위를 되찾은 마법사를 갈망한다. 내기로 모든 마법사를 배제한 노렐은 영국 내 유일한, 첫 번째 마법사의 지위를 얻는다.


인기 정치인 ‘월터 폴’ 경의 병약한 약혼녀가 사망하자 마법으로 되살려 낸 노렐은 더욱 공고해진 유명세로 정치계에 다가선다. 그런데 이 마법은 사실 요정과의 거래였다. 기회가 절박했던 노렐은 신념을 어기고 다른 차원의 요정을 소환한 것이다. 요정인 ‘엉겅퀴 덤불 머리 신사’는 계약을 악용해 ‘레이디 폴’의 삶 절반을 탈취한다. 마법으로 얼마 동안 생명력 넘치던 레이디 폴과 우연히 요정 신사의 호감을 사게 된 흑인 집사 ‘스티븐’은 밤이면 요정 신사의 근거지 ‘잃어버린 희망 Lost Hope’의 성으로 끌려간다. 밤마다 음울하고 지루한 무도회에 참가하는 그들은 산 송장 상태로 피폐해져 간다. 곧 살아난 레이디 폴이 미쳤다는 소문이 사교계를 휩쓴다.


부유한 가문의 신사 ‘조나단 스트레인지’는 목적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연인 ‘아라벨라’에게 청혼하러 가던 중 거리의 마법사 ‘빈큘러스’의 예언을 듣고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조나단의 독학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쓸만한 책 모두를 노렐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창적인 마법 시도에 조나단은 두 번째 마법사로 유명세를 얻는다.

빈큘러스의 예언으로 예민하던 노렐은 막상 조나단을 만나자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협회의 마법사들과 달리 조나단에게는 원천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재능은 노렐 자신이 금기시하는 초월적 힘에 접근하기에 조나단을 제약적인 학습으로 묶어두려 한다.

온전히 이해하는 이는 서로 뿐임에도 그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 하지만 하나로 묶인 주문처럼 그들은 같은 운명에 휩쓸린다.





마법은 분명 마법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마법은 꿈꾸는 것이 아닌가?

서양 고전 속 요정들은 선악과 무관하다. 요정들에겐 모럴이 없다. 유쾌하고 변덕스럽다. 천진하기에 잔혹하다. 미남미녀를 좋아해 번번이 납치한다. 계약을 걸면 후하게 소원을 이뤄주지만 신중해야 한다. 장난과 속임수에 능하기 때문이다. 요정들은 타고난 마법을 당연하게 여긴다. 감자를 깎을 때는 감자칼을 쓴다는 듯이.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속 인간과 요정은 각자의 일상성을 광기와 우스꽝스러움으로 바라본다. 조나단과 노렐은 두 개의 세계를 주선하기 위해 애쓴다. 직업적 자부심으로 가득한 두 마법사는 자신들의 장르가 다른 분야처럼 존경받고 부흥하길 바란다. 

노렐은 매뉴얼화된 체제 순응적 마법을 바란다. 부단한 학습을 통해 쌓은 주문과 통제가 그가 바라는 이상적 마법이다. 조나단은 모든 마법이 결국 태생적 힘에서 기인한다 믿는다. 광기로 비치는 요정의 초월적 힘을 학습해 영국 마법을 복구하길 바란다.

마법에 관한 인간과 요정의 해석은 아주 다르다.



수잔나 클라크가 조밀하게 쌓아둔 기나긴 주석과 문장들은 ‘마법’을 가시화한다. 역사적 배경과 인물, 사유를 녹여둬 곱씹는 즐거움을 준다.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섬세한 차용들이다.


그 상자는 작고 타원형이었으며 은과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연한 청색이었지만 정확하게 청색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며 라일락꽃 색깔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다시 보면 라일락 색깔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약간 회색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가슴에 상처를 입은 상심의 색 The colour of heartache이었다.

다행히 그레이스틸 양이나 고모는 이제까지 깊이 상심해 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상자의 색이 상심의 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요정 신사가 상자에 보관해 둔 것은 레이디 폴이 약탈당한 자유를 은유한다. 선량함에도 위협적인 좌절을 겪어본 적 없는 그레이스틸 가의 두 숙녀는 레이디 폴의 상실을 이해할 수 없다.

경험으로만 온전히 체감되는 일들이 있다. 미리 대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좌절과 고통에 비해 조용하고 은은해 보이는 상심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도 우리를 무릎 꿇릴 수 있다. 이런 사유를 컬러링을 통해 가시화한 대목이다. 별다른 수사 없이 서술로만 이런 은유를 만들다니 읽을 때마다 감탄한다. 번역판을 읽을 땐 오팔 Opal이나 페리윙클 블루 Periwinkle Blue로 상상했는데 드라마에선 빈티지한 푸른색에 그쳐 다소 아쉬웠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당신과 당신 부인을 둘러싸고 있는 마법이 도대체 뭡니까? 당신의 입가에는 붉고 흰 장미가 있어요. 또 부인의 입가에도 있고요. 그것이 무슨 뜻이죠?”


요정의 계약이 누설될까 이중의 마법에 걸린 레이디 폴은 정상적인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게 된다. 부단히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려 애씀에도 입 밖에선 엉뚱한 이야기로 바뀐다. 그녀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입었고 헌신해야 할 남편 폴 경의 노력은 형식적이다. 세군두스만이 미친 사람 취급당하는 레이디 폴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노렐의 압박에도 마법사의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때처럼.

오래된 숙어인 ‘Under the rose’를 시각적으로 치환시켜 마법을 중첩시킨 대목이다.

직역하면 ‘장미 아래서’이지만 ‘비밀스럽게, 은밀하게’의 의미로 사용되는 이 숙어는 비너스의 밀회를 목격한 침묵의 신에게 장미를 주며 부탁한 큐피드 신화에서 유래했다. 유럽 궁전들의 전통적인 회합 장소에 장미 무늬가 애용되는 이유라고 한다.

몰이해로 좌절된 소통을 침묵의 장미로 은유하다니, 너무 우아한 언어적 차용이지 않나?




영국 마법과 현대 마법

세련된 차용은 시대에 관한 조밀한 함의로 더욱 빛난다. 역사를 끼워 넣은 명작들은 많지만 수잔나 클라크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인 ‘마법’을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두 마법사의 여정은 ‘영국 마법’으로 지칭되는 초월적 힘을 찾아가는 모험이다. 이 모험에 능동적인 조나단은 광기를 복원시킨 영국 마법이야말로 그들이 다시 세울 ‘현대 마법’이라고 주장한다. 작가의 트릭을 하나씩 쫓다 보면 극의 현대성으로 19세기 초를 선택한 이유가 유추된다.


우리는 마법사요. 나의 시작과 끝은 그것이오. 당신의 시작과 끝 역시 그것이오. 

우리 둘 다 그것만이 상관있는 게요.


궁극적으로 조나단과 노렐의 목표는 동일하지만 쟁취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조나단은 광기를 장악하려 하지만 노렐은 통제하길 원한다. 조나단은 자신을 제물 삼아 필요를 이루어내지만 노렐은 존재를 지워 자신의 두려움을 부정한다. 조나단은 계층,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는 대중적 마법을 바라지만 노렐은 독점된 학습과 신사에 한정된 엘리트주의를 고수한다.

둘의 마법관을 이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초에 대입해보면 신고전주의로 반동된 낭만주의에 대한 함의가 보인다. 그리스 철학 속 이성적 미학 복원을 주도한 신고전주의는 차가운 계도성으로 피로감을 불렀다. 그 반동으로 인간 본연의 감상성에 기댄 낭만주의가 피어난다. 알다시피 이 두 가지 사조를 거쳐 근대화 (19세기 당시로서는 현대화)로 진입한다. 선대의 계몽주의를 통해 ‘깨우친’ 계급과 상관없이 만인이 평등할 전조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의 고딕 소설 https://brunch.co.kr/@flatb201/296


19, 20세기는 인위적으로 가장 활발한 확장과 탐구가 이루어진 시대다. 마법사들의 협력과 반목은 선구자적 학문의 탄생을 연상시킨다. 주인공들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마법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인물들은 마법사로서의 주체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칠더마스는 밸런스를 유지해 장르의 폐쇄성을 저지한다. 세군두스와 허니풋의 접근 방식은 경험론적 실험이다.

또 이 작품에서 마법의 또 다른 명칭인 ‘광기’는 일상성 밖의 정상성이며 축복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경직된 사고에서 먼 시인, 마법사, 예술가가 더 온전히 그 수혜를 구사한다. 위대함에는 두려움이 동반된다지만 두려움에도 행하기에 위대함으로 향한다. 때문에 전설적인 주인공들의 자리가 전설 속의 어둠과 함께 하는 것은 퍽 어울린다.



그는 마치 자신이 두껍고 더러운 유리벽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렐이 불러들인 마법은 남성 간의 이익에 기반한 구속적 협약이다. 이 마법의 첫 번째 피해자는 ‘여성’이다. 레이디 폴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유를 잃는다. 그 증명이 될 무엇(스포임)은 요정의 전리품이 되는 모욕을 받는다.

두 번째 피해자인 스티븐은 남성이지만 그는 ‘흑인 노예 집사’다. 요정 세계에서나 현실에서나 그의 삶은 반려가 아닌 사육에 가깝다. 그의 직업적 완벽주의도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공, 과 모두 미국이 가져갔지만 사실 노예 거래는 18세기부터 영국 무역과 제국주의의 부강함을 떠받치는 황금 거위였다. 어딘지도 모를 먼 식민지의 모든 것에 영국인들은 당당했다. 월터 폴 경의 완벽한 집사 스티븐은 식민지도 아닌 비참한 노예선에서 태어났다. 폴 가문에서의 안착은 그가 계급체계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온전한 품위를 갖추어도 자신이 항상 부정된 채 흐릿하게 부유하는 존재로 느낀다. 이런 부재성, ‘이름 없음’은 이 작품 내에서 스펙터클한 주술로 활용된다.


요정 신사와 월터 폴 경으로 대변되는 남성들은 이들을 착취하고 시혜적 기만을 떤다. 이에 대한 두 사회적 약자의 대응은 서로 다르다. 여성인 레이디 폴이 치열하게 대항하는데 비해 스티븐이 곧바로 순응하는 것은 계급적 차이에 있다. 스티븐은 마법에 걸린 상태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현실에선 얻을 수 없던 인정에 일정 부분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레이디 폴은 더 낮은 신분이었어도 투쟁했을 것이다. 마법에 걸리기 전 중환자였던 경험으로 그녀는 약자의 처지를 인지하고 있다. 레이디 폴은 자신의 비극이 연쇄되지 않도록 연대를 시도한다.

두 인물은 식민지 착취와 여성의 인권을 담보 삼은 영국 제국주의, 19세기 역사 그 자체다. 현대로서의 19세기에서도 기득권자가 아닌 이들은 여전히 중세 고문과 같은 억압에 희생된다.



그들은 영국인들이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에게 다른 나라의 몰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축복을 받은 족속이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의견에는 항상 의혹을 품었다.)


역사를 절묘하게 엮어 넣은 작품들 속에 수잔나 클라크는 가차 없는 풍자를 선택한다. 대체 역사용 유치한 신조어 대신 역사성의 복원과 해석을 펼쳐 보인다. 드라마에선 아무래도 포인트가 되는 분량만 등장하거나 편집되어 아쉬운 부분을 짧게 남겨본다.


작품의 메인 빌런인 ‘요정 신사’는 엉겅퀴 덤불처럼 헝클어진 은발 머리 신사 Man with the thistledown hair로 묘사된다. 17세기까지 유행한 식물 상징주의는 유럽 여러 국가와 가문의 정체성을 각각의 식물로 표현했다. 백년전쟁의 영국과 프랑스가 장미로 묘사되듯 엉겅퀴 Thistle는 스코틀랜드의 국화이다.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는 유독 강렬한 분위기의 주술적 신화가 존재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또 이 작품에서 마법 자체를 상징하는 ‘레이븐 킹’의 주요 발원지는 요정들의 땅이 존재한다고 여겨진 북영국이다. 요정 신사의 정체를 생각하면 여러 겹의 중의가 고려된 셈이다.


그 유명한 광증의 ‘조지 3세’는 치료를 위해 알현한 조나단에게 마법의 존재를 깨우쳐준다. 조지 3세와 레이디 폴의 광증은 다른 세계의 언어로 해석된다. 요정과 인간의 언어는 각자의 세계에서 완전성을 갖춘다. 손등과 손바닥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하나인 것처럼 인간 세계에서 실행되는 요정의 언어는 이해되지 못하기에 광기로 풀이된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언어를 구사할 뿐 이들은 모두 진실을 말해 매도당한다.


19세기 영국의 아이돌이었던 ‘웰링턴 공작’은 아주 명쾌하다. 책으로 읽을 때는 싸패성이 건강한 사회인 쪽으로 발전한 직장 상사 느낌이었다. 헤테로 정상성의 정점에 있는 인물답게 그는 마법이란 단어도 한껏 비웃는다. 일련의 사건으로 실용성을 캐치한 후로는 비웃음만큼 무지막지하게 남용한다. 때문에 모두가 조나단을 의심할 때도 오히려 명쾌하게 그를 인정한다. 그런 실무자적 추진력은 때때로 해방감을 준다. 책, 드라마 모두 유명한 악담까지 그대로 소환되었다.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메리 셸리’와 더불어 통편집되었다. 조나단과 기질이 비슷한 바이런은 첫 만남에서 이미 서로를 싫어해 득달같이 자신의 출판업자에게 뒷담화 편지를 보낸다. 출판업자는 대상만 바이런일 뿐 같은 불평이 쓰인 조나단의 편지를 받았다. 이후 관계가 회복된 조나단과 바이런은 은연중에 서로의 작품(?)에 영감을 준다. 바이런의 영향을 받은 마법이 보고 싶었는데 드라마에선 아무래도 베니스 마법에 집중하기로 한 듯하다.


바이런과 조나단에게 동시에 불평 편지를 받은 출판업자는 ‘존 머레이 2세’다. 영국 고전을 좋아한다면 익숙할 입지전적 출판 편집인이다. 바이런, 월터 스콧, 찰스 다윈 같은 스테디셀러 작가를 발굴하고 제인 오스틴 같은 여성 작가 포착에도 부지런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노렐을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신사 ‘라셀러스’‘드러라이트’는 장르 자체를 패러디하고 있다. 작품 초반 라셀러스는 조나단처럼 직업을 가지는데 관심 없었다. 조나단이 적성을 찾지 못해서였다면 라셀러스는 영국식 계급체계에 충실해서다. 그는 타인을 착취해 맛보게 된 사회적 권위와 이익에 집착하게 된다. 그의 퇴장은 이 계급의 모럴을 시각적으로 요약한다.

‘목 없는 기수’, ‘유령의 기사’ 같은 중세 호러 로망스의 소슬함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결말이다. 드라마에선 완전히 각색되어 특히 아쉬운 부분이다.




번역과 주석

국내 번역된 단행본 분량은 번역되며 더 과해진 부분 있다. 나름 공들인 듯한데 늘어지는 서술형이 반복된다. 문맥상으로 틀린 것은 아님에도 덕후적인 센스가 떨어져 원작의 매력이 온전히 어필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영문으로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단어들이 로컬라이징 마저 쉽지는 않다. 또 문화사적 친밀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시아권의 우리가 ‘도깨비’란 존재를 설명보다 체험으로 받아들이듯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이 느끼는 직관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진입장벽 난관으로 종종 ‘긴 주석’이 거론되는데 주석 혹은 분량 때문에 이 책에 손이 안 간다는 지적이야말로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주석들은 작품의 근간인 원형적 전설들을 소개한다. 주석만 따로 읽어도 무방하고 본편과는 또 다른 장르적 즐거움을 준다.

오히려 진짜 진입장벽이 되는 것은 도입부를 맡고 있는 노렐의 ‘오타쿠성’에 대한 거부감 여부가 아닐까 싶다. 자의식과 사회성이 반비례하는 노렐은 재빨리 호감 갖기 힘든 인물이다.

그러나 원작의 조밀한 설정에 매혹되는 독자-비단이란 표현에 능라일지 금일지 궁금해하는 타입의 독자라면 비명 지를 것이다. 라이트 노벨 로맨스용 마법을 좋아한다면 지루할 것이다. 만약 이 의견에 반발심이 든다면 생각해보라, 자각하지 못했을 뿐 당신은 이미 이 장르를 좋아한다! 환영합니다~!

길긴 하다;;




아라벨라, 세 가지 엔딩

(구체적인 스포는 없지만 엔딩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불가항력의 몰입, 실패에도 되풀이되는 도전에는 찡한 구석이 있다. 

아라벨라는 연인이기 이전 온전한 후원자다. 아라벨라를 향한 조나단의 시도는 사랑이나 죄책감이 전부는 아니다. 아라벨라 자체가 조나단의 ‘잃어버린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븐 킹의 압도 후에 등장하는 에필로그 같은 엔딩이 퍽 애틋하다. 


그런데 국내판 결말은 초월 번역되었다. 사소해 보이지만 삭제된 아라벨라의 대사는 그녀에게 가야 할 주체성을 거둬내고 조나단에게 좀 더 감정적인 호응이 동하도록 유도한다. 조나단에게 이입해 좀 더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려 했던 것 같은데 국내판만 읽었을 때 약간 어쩌라고 싶었다.


원작의 결말은 산뜻하다. 애틋하면서도 조나단과 아라벨라는 각자에게 꼭 맞을법한 선택을 한다. 독자의 호불호와 무관하게 캐릭터들이 그 성격에 맞게 가져야 할 엔딩을 바르게 차지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원작의 엔딩이 가장 적절하게 여겨진다.


BBC 드라마판 각색은 너무 훌륭하다! 스피디하면서도 꼭 필요한 에피소드들을 거의 구현해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장면마다 호사스러운 미장센에 CG도 적절하다.

드라마 결말도 대사 일부를 시리즈 중간에 배치해 조나단을 살짝 변호해 주는 느낌이다. 그러나 원작의, 특히 여성 등장인물의 주체성을 보존했다. 미비한 분량에도 두 여성 배우의 출중한 연기가 드라마를 내내 주도한다. 또 마침내 돌아온 영국 마법이 어떤 형태의 현대화를 이룰 지에 관한 암시도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책, 드라마 순으로 시도한다면 각색의 수혜에 바들바들 즐거울 테지만, 오늘 하루 너무 지쳤고 본편 정도로 충분하다면 드라마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한 경험이 될 것이다.




고전 동화집 형식을 차용한 수잔나 클라크의 단편집 <Ladies of Grace Adieu and Other Story, 2006>는 현대풍 고딕 소설을 구사하고 있다. 본격적인 스핀오프는 아니지만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미스터 노렐> 완독 후 아쉬워 어쩔 줄 모르겠다면 혹은 시도가 부담스럽다면 해소가 되어줄 것이다.

십 수년만의 신작 <피라네시 Piranesi, 2021>도 성별은 바뀌었지만 강박적인 주인공, 정체가 모호한 악당, 무엇보다 모뉴먼트 밸리 같은 미궁으로 체험적 신비를 선사한다. 분량만 따지면 데뷔작의 30% 분량인데 딱 맞게 압축된 미학과 함의에 정말 놀랐다. 역자 후기에서 읽은 작가의 집필 근황은 삶을 미로로 인식하고 탐구하는 작가적 여정이 느껴진다. 두 마법사의 여정처럼 말이다.



21세기 현대인은 시리를 부르지 주문을 외우지 않는다. 때로는 멀티 패널이 루모스 보다 훨씬 경이롭다.

우리 시대에도 마법이 존재한다면, 그 힘이 정말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면 근원은 같지 않을까? 절대성의 진가는 옳은 방향에서 극대화되고, 생시를 삭제해봤자 탐욕으로 날린 살 煞은 결국 되돌아 본인이 (처)맞을 거라는 오래된 낙관 말이다. 그런 오컬트라면 포춘쿠키와 함께 기꺼이 지지한다.





@출처 및 인용/ 

Jonathan Strange and Mr. Norrell, Susanna Clarke, 2004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문학동네, 2005, 번역 이옥용)

Jonathan Strange and Mr. Norrell (BBC,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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