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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Dec 27. 2022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달그림자


십이월의 첫 번째 달은 꼭 그림책 반달이었다. 지평선에 가물가물 떠내려 가는 금빛에서 시선을 거두기 힘들었다. 현대인이 이럴진대 과거의 사람들에겐 이런 달이 더욱 경외였을 것이다. 토끼도 항아도 없으며 달이 치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인인 우리가 과거의 사람들보다 달을 잘 안다 할 수 있을까? 어둠에 대해서라면 그들이 더 직관적일 것이다.

<미스테리아> 수록분으로 처음 읽었던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은 행간이 끌어가는 소설이다. 달빛은 휘황하지만 충분히 명료하진 않고 적막해 보이는 그림자 안쪽은 분주히 일렁인다.




기담과 고딕

부모, 형제 가리지 않은 태종의 가차 없는 숙청은 즐겨 되풀이되는 조선사 중 하나다.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은 고려와 이방원 일가의 핏물이 채 가시지 않은 태종 6년을 배경으로 한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는데 정작 궁을 채우는 것은 죄책감을 덮기 위한 왕의 호통이다.

어린 소녀들의 심야괴담회처럼 시작되는 이야기들은 경고를 품은 함의로 퍼져나간다. 이야기를 ‘여는’ 이들은 무던하지만 심지 굳은 ‘백희’와 절도 있고 꼿꼿한 ‘노아’다. 우연히 괴이를 나누게 된 두 궁녀는 사연을 캐묻는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비밀을 지켜주려 분투한다. 권선징악이 동반되지 않는 인과야 말로 무섭기 때문이다.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은 고딕 소설의 전통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막대기 하나면 쫓을 수 있는 ‘고양이매’에 대한 왕의 강박은 두려움으로 전이된다. 이 작품의 남성들은 괴력난신의 원인이자 동기로 이야기의 그늘마다 드리워져 있다. 비단꽃 같은 비빈 妃嬪들에겐 로맨스가 ‘강요’된다. 머리채를 풀어 내린 버드나무 아래에서 비밀을 말해선 안 되지만 눈치채는 누군가가 꼭 한 명은 있기 마련이다. 동공 같은 우물과 신축 건물 특유의 정돈되지 않은 황량함은 경복궁을 되려 음험한 폐허로 느껴지게 한다.

마지막 장이 끝나면 들창이 모두 내려진 전각 앞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이 든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들창 너머 두꺼운 침묵 속의 집요한 주시를 이제는 알아챌 수 있다.




벽지의 꽃

작품의 배경으론 익숙하게 접해 온 시대를 선택했지만 관점의 주체는 바꿨다. 돌림자마저 익숙한 이씨 왕조의 남자들 대신 그들의 비와 옹주, 궁녀들의 시선이 교차된다. 역사에 굵게 쓰인 이름 뒤를 음각으로 조밀하게 채운 것은 그녀들이다.

생각해보면 그럴 일이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삼족을 멸하는 무자비함에도 조직의 잔뿌리까지 파낼 수는 없다. 숙청의 칼춤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그날의 일상을 꾸려나간다. 들보까지 튄 대청의 그 흥건한 피들은 누가 다 닦아냈겠나?

왕이 쓰지 말라 말한 것까지 기록한 사초에도 이름이 실린 궁녀는 거의 없다. 지존인 국모도 아비의 성으로 남겨질 뿐이다. 그녀들은 도드라져선 안 된다. 궁금해해서도, 입을 떼어서도 안 된다. 분주히 쓰이되 눈에 띄어선 안 된다. 자의든 타의든 존재가 각인되는 순간 그녀들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남자들은 일단 여자가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여기서는 남자들과 ‘일’을 해야 하는데 남자들은 자신과 ‘공무’를 할 생각이 없다.

..나긋나긋하고 애교 있는 말투로 말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저 약간 비참해질 뿐이다.

..어쩌면 나는 궁녀 일과 잘 안 맞는 걸지도 몰라.


비빈 휘하 궁녀들의 일사불란함에는 조직생활의 고단함이 중첩된다. 층층의 위계, 시답잖은 신경전, 시스템의 압박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하다. 자기혐오인 줄도 모르고 타인을 갉아대는 ‘여적여’ 패거리도, 자매애라는 작은 연대도 모두 물려받았다. 승은 따위는 폐기되었지만 그 욕구만은 각종 성폭력으로 모습을 바꾸지 않았나? 고압적인 마마님들에겐 헤어질 결심을 건넬 수도 없다.

비빈들처럼 당 堂도 재 齋도 없는 궁녀들은 고작 빨랫돌 하나를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함께 갇힌 그녀들은 미치는 줄도 모르고 미쳐간다. 원인이 된 이가 아닌 서로를 상처 내며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비슷한 길을 쫓아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벽지의 꽃처럼.




TALE, 이야기의 이야기

머리를 조아린 자세는 제법 많은 것들을 엿보게 만든다. 대나무 숲조차 없는 궁녀들은 눅진한 여름 달밤, 괴담을 빌어 해갈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함의로, 경고로, 방어로 분산된다. 알아챈 이는 오늘도 무사한 밤을 보낼 것이다.

괴담 보다 먼저 등장하는 ‘궁녀 조례’는 한 줄 한 줄의 행간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 무작위로 작성된 것 같은 항목조차 작성자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과정을 독자는 목격할 수 있다.


二. 궁궐 내에 설치된 우물은 어떠한 것이라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사용 중인 우물을 발견했다면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三. 어느 궁녀에게든 ‘왜 이곳에 들어왔는가’를 묻지 마십시오. 오죽했겠습니까.


十八. 이 항목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습니다.


곱씹어 보면 대부분의 항목이 서늘하지만 특히 18번은 ‘말하지 않음’으로 진짜 공포를 완성한다. 벌써 철 지난 유행 취급을 받는 미투 폭로 때에도, 가장 어두운 곳은 폭로의 기미조차 고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부디 오랜 궁 생활을 바란다는 당부는 서늘한 저주로까지 느껴진다.




(구체적인 스포는 없지만 암시가 있습니다. 읽을 계획이 있으면 아래 두 문단을 건너뛰세요.)

기담의 주인공에 짝 지워진 것은 괴이들이다. 모호함을 안전장치 삼는 화법은 이 화자들을 믿을 수 없게 한다. 각자의 의도는 옛이야기의 의뭉스러움으로 꼬리를 감춘다.

반면 캐릭터들의 설정은 또렷한 장르성을 드러낸다. 남성 등장인물 대부분은 흐릿하게 투과된다. 온갖 설정이 붙은 신비한 꽃미남 ‘강수 선생’마저도 좀 새삼스럽게 느껴져 궁금하지가 않다. 이제는 장르마다 클리셰로 장착된 브로맨스는 시도마다 태종의 개저씨력에 산통 깨진다. ‘연수’ 옆의 ‘양유’라면 대부분 혹할 테지만 대놓고 떠먹이려 들면 동하지 않는 독자에겐 노림수로 느껴질 수 있다.


기담의 의뭉스러움과 별개로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은 시리즈의 첫 번째 권처럼 느껴진다. 외전까지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싶겠지만 본격적인 태풍이 불기 전 프롤로그로 느껴졌다. 

첫 번째 에피소드 <도깨비 집터>가 수상쩍은 배경 속으로 인솔한다면 <사라진 궁녀>는 여초의 연대와 반목을 통해 유폐의 면면을 드러낸다. 속을 알 수 없는 우물과 미친 버드나무, 선연한 피, 우물보다 어두운 눈동자로 고딕 클리셰를 구사한다. 모든 에피소드가 쫀쫀하지만 메시지 면에서도 가장 야심 차다.

때문에 누구를 위한 <천벌>인지 질문하게 되고 만다. 어리석다는 것이 누군가의 졸로 폐기되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나. ‘병화어’에게 최소한의 자의식이라도 있다면 <쥐 중에서 고양이 같은 것>의 ‘서묘’는 자의식이 없음으로 공포를 조성한다. 서로를 부정하는 <군자불어괴력난신>의 정통 유교 인간들과 괴력난신, 두 세계는 불화할 수밖에 없다.

외전으로 규정된 <면신례>는 이야기의 끝을 처음에 물려줌으로써 조밀한 설계의 쾌감을 선사한다. 부디 이 텐션이 꾸준히 유지되어 미미 여사의 에도 시리즈 같은 연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찬양 작가의 조리법은 아는 맛인데도 곱씹게 된다. 역시 <미스테리아> 수록분으로 일부 공개된 <식탐정 허균>도 소재는 익숙했지만 ‘작은년이’의 수다에 꺼벅 넘어갔으니 말이다.

문학도 결국 유행이라 작정하고 영상화가 (그로 인한 부가가치만이) 목표인 촌스러운 작품들이 넘쳐나는데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은 오랜만에 영상화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문장에는 시각적인 찐득함 못지않게 신경증적 사운드로 빼곡하다. 온갖 괴력난신도 흥미로울 테지만 소슬한 땀방울이 맺혔을 불안정한 얼굴들이야말로 정말 근사할 것 같다.

함의로 읽고자 하는 이에게는 함의로, 한담으로 즐기고자 하는 이는 충분히 옛이야기로 즐길 수 있는, 거기에 스릴러도 가미된 매력적인 작품이다.





@출처/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현찬양 (엘릭시르,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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