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텀
왜 이런 방학을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다. 하-프-텀.
영국 초중고는 6~7주에 한 번 씩 방학이 있다.
새학년으로 넘어가는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가 방학 중 제일 긴 대망의 여름 방학.
12월 중순부터 1월 초까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낀 겨울 방학.
3월 말부터 4월 중순 정도까지, 매 년 바뀌는 부활절 날짜에 따라 달라지는 부활절 방학이 2주.
그 사이 사이 쉬어야 할 핑계가 없어서 끼워 넣은 게 '하프 텀'이라고 해서 일주일씩 쉬는 방학이다.
우리 애는 아직 초딩은 아니다. 초등학교 병설 어린이집에 다니는 어린이집 원생이다. 하지만 병설이라 초등학교 학제를 따라간다. 부모가 모두 풀타임 직장인이면, 이런 병설 어린이집은 쥐약.
보통 에누리 없이 딱 9시 정각에 문을 열어, 3시에 문을 닫는다. 게다가 6주마다 찾아오는 방학까지.
애들 방학에 출퇴근을 하려면 친정이든 시댁이든 조부모의 도움을 받거나, 돈을 많이 벌어 시간당 8-9파운드씩 하는 차일드 마인더(보모)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시골이라 그런지, 이 동네는 어린이 집들이 대부분 학교 병설이고, 5시까지 아이들을 맡길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학교가 파하는 시간에 맞춰 3시에 아이들을 데려간다. 나도 그중에 한 명이긴 하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다들 나와 비슷한 것이 더 신기하달까. 출퇴근 직장인이 아니면 '논다'라고 생각하는 건 선진국이라고 해서 딱히 다른 건 아니다. 혹은 집에서 일하면서 버는 돈을 쉽게 버는 돈으로 생각한다거나. (어떤 조건일지라도) 경제활동(일하고 보수를 받는 것)을 하지 않는다거나, 보수가 없거나 적은 일을 하는 직업이나 사람을 경시하는 태도는 이 곳에서도 일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편견의 시선이 팽배한 사회 안에서, 부모 중 한 명은 전업주부, 프리랜서, 자택 근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경우가 우리 동네 어린이집 부모들의 대다수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신기하다.
영국은 만 3세부터 주당 15시간 어린이집을 이용할 수 있는 바우처가 나온다. 그전까지는 아이를 맡기려면 어린이 집 비용을 부모가 충당해야 한다. 보통 시간당 5-6파운드. 아이 한 명을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맡긴다고 하면, 한 달에 1000파운드 정도 든다. 아이 한 명 어린이집 비용으로 부모 중 한 명의 월급 절반 이상은 날아간다고 봐야 한다. 두 명이 한꺼번에 다니면...
부모의 연봉이 13,500 파운드 정도가 되지 않으면 만 2세부터 무료로 아이를 맡길 수는 있다. 근데, 저렇게 수입이 적으면 주택 지원도 되긴 할 거라- 입에 풀칠은 할지는 몰라도, 입에 정말 풀칠만 할 정도의 수입이다. 근데, 저 금액 이상이 되면 모든 지원이 끊겨서 집 월세도 내야 하고, 아이 보육비까지 내야 하니 갑자기 빚더미에 앉게 된다. 저렇게 수입이 적으면 대출도 안된다. 길 바닥에 나 안게 된다고 해야하나. 그러니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최저소득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저소득층이 처한 아이러니랄까.
한국에서도 몇 달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던 경험으로 볼 때, 12-36개월까지의 기간 동안의 보육 지원만큼은 영국보다는 한국이 낫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치여서 가족생활이 소멸되다시피 하는 현상이었다. 과하다 싶은 정도의 물질적 풍요, 소비로 사회적 지위를 성취한다는 착각, 가족과 아이들과의 관계의 공백과 결여를 물질로 보상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아...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근무 시간이 짧아질 수 있을까. 대부분의 직종이 5시에 일을 끝내도 나라가 망하거나 기업이 쓰러지는 일은 여기엔 없는데, 왜 한국은 그렇게 오래오래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나.
가끔 한국에 돌아가 살고 싶다가도 경쟁과 불안에 시달려 대상포진 발진때문에 잠을 못 자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조용히 마음을 접게 된다.
하프 텀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네.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