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폴이고 시몽이고 로제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 著
책을 펼치고 얼마 후, 나는 쉽게 '폴'에 감정 이입됐다. 같은 여자였고 사랑의 고통에 침잠해 있었다. 당시의 나도 H와 이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폴은 늘 로제를 기다리고, 로제가 아닌 전화에 배신감을 느끼고, 그와의 헤어짐을 상상하지만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폴은 나였다. 그녀의 오랜 연인 로제는 폴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다. 자신의 자유와 해방감이 더욱 중요하다. 로제는 나에게 이별을 고한 H였다.
25살 청년 시몽은 폴을 사랑하게 된다.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기에 부담스럽고 감동적이다. 이토록 나만을 바라보는 남자라면 나도 사랑에 빠질 것 같았다. 그러니 폴도 시몽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했으나 왠 걸. 그녀는 결국 로제에게 돌아간다. 나의 선택이 늘 그랬듯이. 자신을 좋아해주는 이보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대부분 외로움과 슬픔, 비참함을 동반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H와의 연애가 저 세 단어로 압축되는 것 같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이 구절, 시몽의 대사를 적어내려가며 깨달았다.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H와의 연애에서 나는 폴이 아니었다. 시몽이었다.
나의 행복도 좋지만 상대도 나로 인해 행복하기를 늘 바랬다. H가 나와 있을 때 행복감이 아닌 죄책감과 의무감을 느낀다고 했을 때야 비로소 그를 놓아줄 수 있었을 정도로. H는 폴이 시몽에게 그랬듯, 나에게 안쓰러움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자신이 상처 줄 것임이 자명한 이, 즉 나를 바라보며 폴처럼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을 수도 있겠다.
시몽과의 관계에서 폴은 로제였다. 그에게 고통과 불안을 선사하는 잡으래야 잡을 수 없는 연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연애에서 시몽이, 폴이, 로제가 될 것이다. 완벽한 가해자도 완벽한 피해자도 없다.
H와 나는 결국 몇 달만에 다시 만났다. 우리는 전처럼 그가 나로 인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때 다시 이별할 것이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시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