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는 밤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가 고단했다면 더욱 그렇다. 하루의 시작과 하루의 중간과, 하루의 끝의 기분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기에, 시간에 따른 인사말이 각각 존재하는 것일 테다. 동시에 사람들에게는 낮이 필요하다. 과분한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다 보면, 어느새 밤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늘 시간에 대해서 욕심을 내니까. 오늘을 48시간으로 늘려서 살았으면 좋겠다가도 12시간 안팎으로 압축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니까. 아침엔 어떤 기분으로 인사를 했더라? 그 누구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인사를 건네지도 받지도 않고 싶은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낮이다. 욕심은 금물이다.
오늘 처음 본 당신에게 ‘곰방와’로 인사했었죠. 제가 아는 일본어는 별로 없었거든요. 당신은 길을 알려주었다는 고마움에 커피를 산다고 했어요. 그 전에 먼저 커피를 좋아하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앞으로 이어질 어색함에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침 커피를 꾸역꾸역 마셨을 때와는 다른 맛일 거라고 기대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 당신이 좀 궁금했던 것 같아요. 당신은 한국에 온 것이 두 번째라고 했고, 이번에는 일 때문에 한국에 온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쭈뼛쭈뼛 상대에게 내놓을 수 있는 자신의 정보들을 말했어요. 한 문장씩 천천히요. 평소에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데, 이렇게 몇 문장을 주고 받는 것으로도 대화가 되는 게 신기했어요. 동시에 언어의 자유로움의 필요성도 느꼈고요. 당신을 다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다 알 것 같았어요. 우리 둘 다 각자의 일에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묘한 동질감도 느꼈어요. 당신이 알려줬죠. ‘곰방와’가 아니라 ‘곤니찌와’라고. ‘곰방와’는 ‘굿 이브닝’, 저녁 인사라고. 어쩌면 빨리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나 봐요.
네가 연예인이야? 그런 말 있잖아. 상대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는 의미의 말. 근데 생각해보니까 너 연예인 맞더라. 그래서 그 말을 못했어. 넌 아주 꽁꽁 싸맨 채 나타났어. ‘호들갑 떨 수 있는 연예인’의 기준은 뭘까? 얼마나, 어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그럴 수 있는 거야? 말은 이렇게 해도 난 되게 반가웠어. 바쁜 와중에 네가 짬을 내서 와준 게 기특했거든. 너랑 같이 있으면 재밌지만 진지한 느낌은 안 들어. 진지한 게 뭔지 모르겠어. 난 늘 그걸 몰랐어. 결혼 같은 걸 해야 진지해지는 건가? 난 산 타는 거 싫어해. 더군다나 남산은 더 싫고. 얽혀 있는 게 많은 장소일수록 싫어지나 봐. 이상하지? 추억이나 감정이 많이 묻어 있는 곳일수록 애정이 간다고 하잖아. 한 때 자주 듣던 음악처럼. 옛날엔 그랬을지 모르지. 나도 많이 변했나 봐. 더 메말라졌어. 난 실내가 좋아. 잘 정돈되고 꾸며진 공간이 좋다고 나도. 무슨 촬영을 남산에서 하냐고, 어쭙잖은 조깅 씬이라도 있는 거냐고, 그런 장면이 있는 드라마라면 안 봐도 훤하다고, 퍼붓고 싶었어 사실. 네가, ‘너 만나서 이상해진 거야.’ 라고 그랬거든. 난 무언가 변한 것에 대해서 네 탓 안 하잖아. 생각해보면 할 필요도 없지. 뭔가를 변하게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야. 그냥 넌 나이를 먹고 나도 먹고 이 산도 계절을 좀 지낸 것뿐이라고.
그러고 보니 낮에 너랑 커피 마신 적도 없네. 넌 나랑 밤에만 함께 하니까. 사람에게 낮과 밤 중 어느 시간대가 더 중요한지는 모르겠어. 그건 사람마다 다르잖아. 근데 이렇게 러프하게 주고 받는 감정들이 가끔은 상처가 된다는 건 확실해. 난 너 부럽지 않아. 근데 넌 내 낮을 무시하고 밤을 기꺼이 내어주길 바라잖아. 내가 자꾸 선글라스 벗기는 이유야. 햇볕 아래 잘 걷고 있는 나를 좀 보라고.
하루에 커피를 얼마나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다가 48시간을 살 것 같아요. 저는 오늘 10시간 만에 하루를 마치고 싶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이런 농담 싫어하죠. 아니, 어떻게 사람이 10시간만 하루를 살 수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죠. 제가 이런 말을 던지면 당신은, ‘그런 말 하지마요. 제가 은희 씨가 10시간보다 몇 시간 더 살 수 있는 하루를 만들어드릴게요.’ 라고 하곤 했죠. 저는 당신의 열정이 참 좋았어요. 모든 것에 진심일 수 있는 마음. 당신이 제게 그 넘치는 진심을 좀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을 가볍게 만났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더욱이 아니었죠. 상처받기 싫어서 진심을 좀 아껴뒀었는데 당신에겐 아끼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진심을 줬어요. 저는 남산이 싫어요. 저는 좋은 날씨가 싫어요. 저는 사람들이 날씨를 즐기는 게 싫어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은 저에게만 진심인 게 아니더라구요. 진심에도 순서가 있나봐요. 진심 원, 진심 투, 진심 쓰리. 전 하나밖에 가진 게 없어서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이제 남산 타지 마세요. 불쑥 나타나서 불행해지기로 했다는 둥, 슬쩍 납득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어쨌든 다 당신 선택이었잖아요.
어느 작품의 독백이다. 이 대사들을 얼마나 외우고 외웠는지 모른다. 이제는 작품 속 인물이 나고, 내가 이 인물 같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 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 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한 모금 들이키는 몸짓)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야 밤이다. 이제서야, 하루를 마무리하며 산을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곰방와’라고 먼저 건네주는 누군가. 이런 밤이면 오래 전의 꿈을 펼쳐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가로등 아래서 춤추는 것으로. 이렇게 긴 하산길이라면, 아직 다가오지 않은 꿈을 슬쩍 구성해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주인공이 해피엔딩으로 향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하루 끝에 은희는 게시물을 하나 올린다. 이런 태그들을 달고.
#폴라로이드처럼 마음을 조심히 다루기
#밤을 잘 걷다
#햇빛 구경 실컷하고 내려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