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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느니 쓰지 Jan 26. 2020

또 브랜드 신앙고백서야?

No.29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창 취준생으로 살던 시절 면접 예상 질문을 대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중 하나가 "사람들이 명품을 사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이었다. 명품 자체를 반대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명품을 찬성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별로 진정성 없어 보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명품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꼭 하나 가져보고 싶은 브랜드도 없었다. 그래도 면접에서 차별성을 얻기 위해  나름 그럴싸하게 이런 답변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저는 명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있진 않지만 사람들이 명품을 살 때 그 명품의 가치를 잘 알고 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히 비싸거나 희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를 도입한 입생 로랑의 도전정신을, 클래식 안에서 새로움을 기어코 찾아내는 라거펠트의 패션에 대한 애착을 알고 명품을 사는 사람이라면 소비자 자체로 명품이지 않을까요?"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치기 어린것도 아니고 그냥 무식한 답변들을 준비했다. 어설프게 네이버에서 명품 몇 개 검색하고 준비한 답변이었다. 명품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스토리를 놓치지 않는 사람처럼 나를 포장하는 답변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면접에서 한 번도 그런 질문은 받아보진 않았다.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는 광고기획사 이노션 월드와이드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안성은 작가의 책이다. 개인적으로 '안성은'이라는 이름보다 '브랜드 보이'라는 닉네임이 더 익숙하다. 브랜드 보이는 페이스북에 꾸준하게 뉴스를 링크하는 사람이다. 기사를 링크하고, 핵심 문구를 적고, 그 아래 자기 의견을 짤막하게 남긴다. 뉴스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브랜드 보이는 꽤 괜찮은 큐레이터다. 그가 퍼 나르는 기사들은 '아무나'  베껴 쓰는 허접쓰레기 같은 기사가 아니다. 사회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한 기사부터 깊이 있는 인터뷰까지 경제, 사회, 문화 등 대부분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인사이트를 준다. 내게 있어 브랜드 보이라는 브랜드는 광고기획자보다는 뉴스 인플루언서에 가깝다.

브랜드 보이는 꽤 괜찮은 뉴스 큐레이터다

안타깝게도 그가 처음으로 낸 책은 뉴스 큐레이터로서의 브랜드 보이의 책이 아닌 광고 기획자 안성은의 책이다. '사고 싶고 갖고 싶은 브랜드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브랜드'에 관한 책이다. 총 25개의 브랜드를 팔리는 '이유'에 따라 사명, 문화, 다름, 집요, 역지사지 총 5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배달의 민족, 무인양품 같은 브랜드부터 관심자가 아니라면 생소한 빔즈(패션), 모노클(잡지) 같은 브랜드도 언급한다. 각 브랜드마다 10~15페이지에 브랜드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이 브랜드가 '팔려나가기 시작한' 결정적 순간들을 담았다. 광고회사 기획자답게 브랜드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포인트들을 정확히 짚어낸다. 어떤 브랜드는 고유의 철학을 우직하게 지켜서, 또 어떤 브랜드는 변화하는 시대상에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팔리는 브랜드가 되었다.

책은 예를 들어 이런식입니다

책의 재미있는 점은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들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브랜드와 팬들의 관계를 교주와 신자의 관계로 묘사하길 좋아한다 ('교주'라는 단어는 보기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순수하게 '종교 창시자'에 가깝다).  예를 들어 '이것은 이 브랜드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같은 문장이 꽤나 여러 번 반복된다. 성경의 한 부분을 차용하고, 자신의 종교생활의 한 경험을 글에 녹이는 것 또한 꽤 많이 나오는 수사다. 저자는 현대의 성공하는 브랜드에는 저마다 '종교성'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마케팅이라는 행위가 종교와 구조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말하고 싶었던 걸까?

슈프림 팬들을 신도라고 표현한 페이지 이 외에도 교주-신도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은 많습니다

그 '종교성'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기도 하다. 본인 스스로를 어려서부터 '브랜드에 미친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미친 사람의 눈에는 대상에 대한 아름다운 것들만 보였다. 각 브랜드들에 대한 아쉬운 점이나, 비판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소한 이 책에 소개된 25개의 브랜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이 책이 브랜드를 중립적으로 보는 것이 목표인 책은 아니다. 25개의 아름다운 성공신화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이런 '마케팅 성공기' 책들이 주는 천편일률적인 찬양적 태도를 브랜드 보이도 답습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런 면에서 다른 마케팅 서적들과의 차별성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25개의 브랜드 백화점에서 흥미로운 브랜드 몇 개만 취사선택해서 읽어도 되는 정도의 책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말했듯 이 책은 이론서가 아니라 사례 중심의 실용서다. 책이 너무 대상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로만 넘쳐난다고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누가 이 책만 믿고 여기 나온 브랜드와 묻지도 않고 사랑에 빠지겠는가. 다들 각자가 가진 정보를 토대로 좋아하는 브랜드를 결정하기도 하고 금세 실증 내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브랜드 뚜쟁이 같은 책이다. 주선자로서 소개팅 상대를 매칭만 시켜줬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뒤로 에프터를 하든, 연애를 하든, 속아서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든 그건 소개받는 사람의 몫이다. 뭐 주선이 잘되면 술이 석 잔이고 잘 안되면 따귀가 석대 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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