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위생등급제인가
그냥 사서 쓰시면 안돼요?
최근 이주 사이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음식점이 일반 로드샵이 아닌 특수매장이기에 자리를 옮긴 6개월간 가장 많이 신경쓴 부분은 입점사의 요구사항을 숙지하고 반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반 개인매장이 아니기에 따라야 할 규칙과 제도, 시스템이 있었고 또 입점사에서 진행하는 행사들도 있어 준비해야할 작업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요식업에 종사했던 지난 10여년의 시간들속엔 시작은 동네상권 로드샵이었으나 중간중간 백화점, 대형마트, 지하철 매장까지 특수매장이 있었기에 사실 이번 경험이 저희에게 그리 새로운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필리핀의 대형몰 입점이 좌절되고 쫄딱 망한 상태에서 선택한 마지막 장소가 이곳 제주도였던 만큼 남편과 저는 사실 좀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한적한 바닷가 앞 아주 작은 창고매장에서 시작했던 버거집이 어찌하여 방송을 타고 코로나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아 제주를 찾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고 이후 저희는 다시 육지 백화점과 몇몇 특수상권에 매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여름밤의 꿈처럼 일년도 안된 짧은 시간안에 육지의 모든 매장들은 철수했으며 제주의 첫시작이었던 본점마저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하던 시절, 그전에 입점했던 곳의 관리업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제주 특수상권에 매장이 나왔는데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조건이 그리 나쁘지 않아보였고 무엇보다 살고 있는 집과 너무도 가까운 곳이었기에 저희는 약간의 고민끝에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편과 저는 다시 조직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최근 관리업체의 가장 큰 화두는 '위생등급제'입니다.
입점해 있는 마사회측의 요구이기도 했고 업계의 트렌드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위생등급제'에 통과하기 위한 미션이 입점업체 모두에게 주어졌고 부랴부랴 본사 측에서 줄지어 인력들이 파견되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본사의 관리자와 위생사는 물론이고 앞서 등급제에서 최상위 점수로 통과했다는 지역의 점장과 본부의 팀장, 팀원들이 주말동안 연달아 제주를 찾았습니다.
조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미션은 동일하나 전략은 개별적이며 전술은 산만하고 정보는 중복되었습니다. 청소와 성분표시, 유통기한의 중요성이 반복되고 점검사항이 쏟아지는 가운데 제가 계속해서 들어야 했던 질문이 있었으니 메뉴에 들어가는 모든 소스와 김치를 만들어 쓰는 제게 모두는 번갈아가며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그냥 사서 쓰시면 안돼요?"
시판되는 소스나 김치에는 성분표시와 유통기한이 찍혀 나오기 때문에 보관만 할뿐 따로 표시할 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사업장에서 직접 만드는 소스들에는 들어간 재료를 일일이 표기해야 하고, 각각의 재료마다 원물을 보관하고 있어야 하며 유통기한 또한 짧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예를 들어 비빔국수 양념장의 경우 들어간 고추장, 간장, 식초, 물엿, 설탕, 참기름, 조미료의 각각의 성분표시와 유통기한을 양념통에 기재하고 각각의 시판원물의 박스를 보관하고 있어야 하며 사업장에서 제조한 날짜와 유통기한(장류는 최대 1개월)을 따로 표기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뉴마다 들어가는 소스는 거의 다 만들어 쓰고 있는 저에게는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고 그만큼 번거로웠으며 그러다보니 굳이 이걸 왜 만들어 쓰는 건지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것 같았습니다.
"사장님, 소스가 너무 많아요. 요즘 판매되는 소스들도 얼마나 잘 나오는데요. 그냥 사서 쓰시죠."
"뭐하러 힘들게 김치를 담그세요? 중국산 김치도 맛있는 거 많은데 다른 데는 다 김치 사서 써요. 몇군데 맛보시고 그냥 사서 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두명도 아니고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진지하게 충고라고 하는데 일일이 설명하는 저로서도 나중에는 회의감이 들면서 한편으론 자존심도 상하고 많이 흔들렸습니다.
소스를 만들어서 쓰는 건 시판되는 소스가 너무 달고 짜고 강해서였고, 매주 배추를 사다 직접 김치를 담그는 건 유일한 반찬인 김치 한가지만이라도 직접 대접하자는 나름의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한여름 배춧값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한없이 치솟을땐 김치 더 달라는 손님들을 은근 노려보기도 했고 손님이 늘수록 해야하는 김치의 양도 늘어 배추를 저리고 버무리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어 후회가 밀려들기도 했지만, 그건 지금의 국숫집을 하겠다 맘먹은 처음부터 결심했던 저와의 약속이었습니다.
물론 나이 오십에 김치를 직접 담근건 몇해 되지 않을정도로 경험이 적고, 매번 할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시행착오를 아직도 겪고 있는 미숙한 초짜이지만 제가 김치는 내 손으로 직접 하겠노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7년전쯤, 전 잠실 근처에서 작은 고기국숫집을 연 적이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열었던 고기 고로께가 미친듯이 팔려나가던 시절, 운이 좋았던 생각은 못하고 다 제가 잘나 그리된줄만 알던 때, 내가 하면 뭐든 다 잘될꺼라며 고로께집 건너편에 작은 국숫집을 열었습니다. 그것도 친정엄마의 돈을 빌려서 말이죠. 상권분석도, 고긱국수에 대한 오랜 연구도 없이 덜컥 그렇게 시작을 해버렸습니다.
오픈직전, 남편의 지인이었던 제주에서 오신 쉐프님은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셨습니다.
"국수는 딱 두가지죠. 면과 김치. 그 두가지는 사서 쓰지 말고 매장에서 직접 해야 합니다. "
저는 그 얘길 듣는 순간 피식 웃었습니다.
'생면을 쓰려면 반죽부터 해야 된다는 얘긴데 누가 그걸 반죽하고 있냐고? 제주도에서도 다 건면 쓰는데. 건면도 얼마나 잘 나오는데 모르시는 소릴 하시네. 그리고 언제 김치를 담근담? 요즘 중국산 김치도 싸고 맛만 좋드만. 코딱지만한 가게서 혼자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김치까지? 연달아 식당 실패하신 이유가 있구만.'
참 어리석고 자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국숫집은 그야말로 쫄딱 망했습니다. 3개월을 겨우 버티다 결국 문 여는 게 손해인 걸 인정하고 문을 닫은채 남편과 대형마트 입점업체로 들어가버렸고 몇달이 지나 인수자가 나타났을땐 들어간 인테리어 비용은 커녕 권리금도 몽땅 포기한채 보증금마저 몇달간의 임대료를 제하고 절반도 받지 못했습니다.
장사가 안된 만큼 텅빈 가게를 지키던 그 시절의 저는 미치도록 불안했고 처절하게 외로웠습니다.
그렇게 국수와는 인연이 없다 생각했던 제게 제주에서 국숫집과의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가졌던 후회를 곱씹으며 면까지 직접 만들순 없지만, 김치만큼은 직접 해보자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그들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반복되는 질문 속에 전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이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묻는다는 건, 시판되는 김치에 비해 내 김치가 맛이 없다는 얘길까? 그 얘길 애둘러 표현하려는 거겠지?'
'꼬박 김치에만 하루가 걸리는데 이참에 그냥 사서 쓰면 나도 하루는 더 쉴수 있지 않을까? 언니네도 중국산 김치 사서 쓰는데 손님들이 다 맛있다고 했다잖아. 거기 연락처를 물어볼까?'
김치를 하지 않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신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거운 배추들을 옮기지 않아도 되고 날씨에 따라 저리는 시간이 달라 저녁마다 동동거리지 않아도 되고, 염도가 오락가락하며 짜다 소리 안 들어도 되고, 매번 번거로웠던 양파와 사과를 안 갈아도 되니 그것도 좋았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아낄수 있고 그러면 짧은 여행도 다녀올수 있고 김치하는 날마다 힘들어 가족에게 냈던 짜증을 안내도 되니 가족도 좋고 손님도 좋고 무엇보다 나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소신이란 이름으로 고집스럽게 고수했던 나의 행동이 오히려 꼰대의 아집이었음을 깔끔하게 인정하니 온 세상이 환해보였습니다. 때마침 TV에선 옆 매장도 쓰고 있다는 제주의 김치브랜드 광고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 나도 파는 김치 쓸래!"
나의 선언에 남편은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며 돈 좀 더 쓰더라도 그냥 남들처럼 좀 쉽게 살아보자며 동의했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대에 누운 그날밤, 저는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타협한다구? 그럼 소스도 사서 쓰고 다 사서 쓰지. 이 집도 저 집도 다 똑같은 맛이면 식당에 누가 올까? 그럼 뭐하러 음식을 팔아? 그냥 밀키트 장사를 하거나 편의점을 하지.'
'위생이 중요한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검열은 너무한 거 아닐까? 그럼 집에서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들은? 곰삭은 묵은지는? 일일이 담근 효소들은? 텃밭에서 수확한 고추, 깨로 만든 양념들은? 그 귀한 것들을 인정 못하면 전통이란 게 있을수 있나? 대체 누굴 위한 제도일까?'
'세상에 쉬운 길, 편한 길이 있었어? 없었다는 건 누구보다 너가 더 잘 알잖아. '
'그래, 네 김치가 맛이 있을 때도 맛이 없을 때도 있어. 그런데 너가 그만큼 연구하고 노력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그냥 포기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수 있어? 이제 그렇게 안 살기로 했잖아. 좀더 집요해지로 했잖아. 또 대충 살 꺼야?'
"끙..."
내면의 소리는 지치지도 않고 점점더 저를 거세게 옥죄어 왔습니다.
뒤척이며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그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전 남편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자기야, 나 결심했어. 김치 다시 잘 담궈보기로. 좀더 노력해볼래."
매장에 출근하니 본사에서 온 또 다른 이가 묻습니다.
"사장님, 그냥 사서 쓰시면 안돼요?"
"그렇게 다 사서 쓸 꺼면 음식점 하면 안되죠."
다시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좀더 노력해보기로 합니다. 나만의 레시피를 찾을 때까지.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