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2025. 5. 11. 일요일.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른다.
1층을 지나 P층. 아직 P층이 왜 필요한 건지 잘 모른다. P층은 다른 층과 다르게 더 많은 계단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P층의 기능적인 면이 뭘까? 왜 다른 층과 달리 더 층고가 높을까?
3층까지 올라왔는데 숨이 차지 않아서 내 호흡량이 좋아진 건가 싶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수술한 오른쪽 폐주위가 아프다. 갈비뼈 아래와 겨드랑이 근처 가슴이 욱신거리고, 등이 묵직하다. 쉽게 숨이 가빠진 게 아닌가 싶다. 3층까지 올라왔는데도 숨이 차지 않으면 내가 건강해진 거겠지?
4층을 오르자마자 숨이 차오른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숨이 차오르지? 그래, 폐가 안 좋아서 그런 거겠지. 기분이 안 좋다. 폐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4층에서도 숨이 차지 않으려나?
6층을 오르는데 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목구멍을 짜면서 내 몸이 숨을 채우고 있는 건가? 숨을 오래 참고나면, 숨을 들이마시기보다 뱉어내기부터 하는데, 인간의 몸은 내부에 이산화탄소 증가를 더 못 견디나 보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 안의 목소리가 '이런 무의미한 일을 왜 하느냐'라고 묻는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10층을 오르자 포기하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이 집에 가는데 10층 이상의 계단을 오르나? 아니? 10층이라면 올라가겠지. 10층을 오르자,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남은 계단이 더 많다는 게 생각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다. 아, 앞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올라간다.
12층에 올라왔다. 엘리베이터 타기엔 지금도 늦지 안 않아. 목은 왜 이렇게 아픈 거야?
14층에 오르자, 앞으로 10층이 남았다는 게 신기하다. 와, 절반을 넘었어!
그리고 아직 엘리베이터 타기에도 괜찮아!
계단 곳곳에 장애물이 있다. 지나가기 어렵게 자전거들이 세워져있기도 하고, 아이들이 몰래 버린 걸로 추정되는 과자와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몇몇 보인다. 아마 청소하시는 할머니가 치워주시겠지. 내가 그걸 주우려고 멈추는 순간 엘리베이터 탈 거란 생각이 든다.
청소 할머니를 계단에서 만난 적도 있다.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인사하셨고, 나도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파트 계단 중간에서 만나니, 1층 로비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보다 더 반갑다. 계단에서 사람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잖아?
16층에 오르자 이제는 엘리베이터 타고 싶지 않다. 아냐, 아냐. 아직 엘리베이터 타도 괜찮아,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은, 잠시 올라오긴 했지만, 이제는 포기할 수 없지. 점점 계단을 올라갈수록 생각이 사라진다.
18층에 오르자, 나의 숨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20층부터는 아파트 주민을 만날까 봐 무섭다. 숨을 헥헥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나를 보고 이상하게 여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변명하는데 필요한 숨이 없다.
23층. 아, 이제 한 층만 더 오르면 되는구나.
24층에 올라, 복도로 진입한다. 아, 이제 드디어 우리 집이다. 공중에 위치한 우리 집. 가장 안쪽에 있는 우리 집 문을 연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열이 내 몸을 빠져나가면서 땀을 배출하는 게 느껴진다. 추운 날에도 땀을 흘릴 수 있다니. 실내 자전거보다 계단 오르기가 운동에 더 효과적인 것 같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내가 싫을 때, 가끔 계단을 오른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는 무거운 감정을 뒷목과 어깨에 걸치고 집에 도착하는 것 같은데, 계단으로 집에 가니 감정이 아니라, 내 몸이 무겁다. 그렇다고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 몸이 조금 더 무거울 뿐이다.
내가 하는 게 진짜 천국의 계단 아닌가? 하늘 가까이로 가고 있는 걸.
오늘 기록 단축을 했다. 7분 28초에 오르던 것을 6분 20초로 줄였다. BPM은 평균 170에서 155로 줄어들었다. 인상적인 건 오늘 나는 원피스를 입고 계단을 올랐다는 것. 치마도 길어서 두 손으로 잡고 올라갈 때도 있었다. 누구 만날까 봐 진짜 두근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