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하트. 김밥.
대한민국에서 김밥집 찾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흔해서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인터넷 지도에 '김밥집'이라고 검색을 하면 수두룩하게 점이 찍힌다. 한 집 건너 또 한 집 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그 빈도가 카페와 비교해도 될 정도다. 심지어 간판은 카페인데 언젠가부터 '김밥도 합니다'라는 문구가 걸린 집도 본 적이 있다. 커피향을 맡다가 문득 김밥 생각이 날 것 같진 않지만, 카페 사장님이 사업 방향을 바꿀 정도로 김밥의 수요는 줄어들지 않는가 보다.
나는 최근까지도 김밥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좋아하던 김밥은 엄마가 만든 김밥인데, 정성과 재료로 꽉 찬 그 맛에 길들어 사먹는 김밥은 맛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 교내 카페에서 나름 유명한 (졸업생도 종종 생각나 찾는다는) 참치김밥을 먹게 되었는데, 큼직큼직하게 썰어진 김밥은 반 이상이 참치로 꽉 찬 별미였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참치의 딱 좋은 식감이 포인트였다. 다른 김밥집과 다르게 쭈글쭈글한 치자 단무지가 같이 나왔는데, 일반 단무지보다 신맛이 덜하고 살짝 쫄깃한 식감에 빠져 '단무지가 이렇게 맛있구나'하고 감탄했었다.
뒤늦게 김밥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김밥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부터다. 영국에서 4년간 살면서 김밥을 먹은 기억이라곤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한국식당에 가더라도 찌개와 고기부터 찾았지 굳이 김밥을 주문하게 되진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한국 슈퍼에서 장을 볼 때 계산대 근처에 떡이나 약과류와 함께 놓여있던 김밥을 사 먹는 정도였는데, 허연 스티로폼 팩 위로 씌워진 랩 안에 짓눌려 있는 김밥은 한국에서 먹던 큼직하고 맛깔스러운 김밥에 비하면 초라했다. 작은 네모가 된 당근, 우엉 등의 재료는 소심하게 가운데 몰려있었고, 김밥의 큰 비율을 차지하는 밥의 가장자리에는 존재감 없는 얄팍한 김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슬픈 김밥도 나는 그저 반가웠다. 한국에서는 절대 사 먹지 않을 김밥이었지만, 고소한 참기름 냄새는 그립고 정겨운, 집의 냄새였다.
일본에서는 그나마 좀 상황이 나았다. 도쿄에서 또 4년간의 타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한국의 유명 김밥 체인들이 막 들어오는 시기였다. 내가 일하던 곳은 시부야 근처였는데, 시부야 역 지하에는 각종 도시락과 디저트, 식재료, 주류를 망라하고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Foodshow라는 곳이 있다. 오전 열 시가 되면 스피커에서 종소리와 함께 안내 방송이 나오며 문을 여는데, 오픈 후 약 5분간 점원들이 마네킹처럼 서서 90도 인사를 한다. 가끔 이 곳에서 점심을 미리 사서 회사로 향하곤 했는데, 나는 열 시 반 출근이라 후딱 사서 바로 나와야 했다. 그러려면 띄엄띄엄 서서 일제히 '이랏샤이마세'하며 깍듯이 인사하는 점원들 사이로 지나가야 했는데 매번 어찌나 불편하던지. 지금 쓰면서도 오그라들 만큼 불편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재빨리 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김밥집이었다. 메뉴는 서너 가지다: 불고기 김밥, 야채 김밥, 김치 김밥. 재료도 꽉 찬 편이고, 주문하면 기름칠을 한 번 하고 그 자리에서 썰어준다. 런던에서 먹던 김밥에 비하면 호화롭지만 가격이야말로 사치다. 김밥 한 줄에 한화로 무려 8000원! 한국에서는 더 푸짐하고 다양한 맛을 반값으로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생각하면 마음만 아플 뿐이다.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해서 사 간 김밥을 점심시간에 꺼내서 먹으면 주변 동료들이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 일본인이 아니라 영어권 사람들이었는데, '어, 그 스시 (노리마끼) 어디서 샀어?'라는 질문이 나오는 순간, 김밥에 대한 나의 열정은 마치 터진 김밥처럼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왔다.
나: "스시가 아니라 김밥이거든. 스시는 식초로 간을 한 달콤 쌉싸름한 일본음식이고, 김밥은 참기름과 깨소금을 베이스로 한 고소한 한국음식인데 안에 넣는 재료도 더 다양하지. 한국에서는 서양에서 샌드위치 먹는 것처럼 간단한 점심으로 많이 먹어. Foodshow에서 살 수 있으니 한 번 먹어보렴."
동료: (물러나며) "오, 오케이..."
그렇게 몇 번 말로 옮기고 나서인지, 김밥은 정말 훌륭한 한 끼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안에 넣는 재료에 따라 매력도 다르고, 다양한 영양소를 말 그대로 한 입에 넣을 수 있으니 정말 간편하다. 수년간 김밥이 결핍된 삶을 살다가, 돌아온 한국에서의 생활은 새 생명 얻은 삶과도 같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2020년 여름 한국에 돌아온 뒤로 가장 많이 사 먹은 음식도 물론 김밥이다. 우리 집 반경 2km 내로 웬만한 김밥집은 꿰고 있다. 지금은 제일 좋아하는 곳을 주로 간다. 최근에는 김밥 메뉴도 다양해져서 가게마다 잘하는 김밥도 다르다. 바삭한 돈가스 김밥, 톡톡 터지는 날치알 김밥, 매콤한 땡초 김밥... 말 그대로 김밥천국이다. 나는 뒤늦게 구원받은 신자마냥 주변 사람들에게도 징그럽게 김밥 찬양을 늘어놓는다. 다들 아나, 이렇게 좋은 걸? 김밥 믿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