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재료에서 느끼는 친숙한 짭짤함
영국의 요리연구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나이젤라 로슨 (Nigella Lawson)의 최신작 <Cook, Eat, Repeat: Ingredients, recipes and stories>는 약 20페이지 분량을 한 가지 재료에 할애한다. 아니, 헌정한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A IS FOR ANCHOVY'라는 챕터는 저자가 앤초비에 대한 열정을 숨김없이 써 내려간 러브레터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확연히 나뉘는 식재료 중 하나이지만, '강력한 염분이 선사하는 단호하게 짠맛에 한 방 먹은 뒤로 울려 퍼지는 풍부함과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저자가 망설임 없이 늘어놓는 찬사가 적확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으로 가득한 한 편의 서정시로 읽히리라. 나는 이 챕터를 읽는 내내 강렬한 짠맛을 갈망하다가, 앤초비를 사서 약 한 달간 거의 매일 앤초비 토스트 (빵을 구워 버터를 잔뜩 바르고 앤초비를 얹는다)를 만들어 먹었다.
책에도 쓰여있듯이 서양 사람들에게 앤초비는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뚜렷한 구분이 비교적 쉬운 식재료다. 같은 재료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멸치의 호불호에 대해 물어본다면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멸치를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멸치는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를 떠나, 항상 우리 밥상에 존재한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속에, 잔치국수의 육수로, 조림류의 국물로, 액젓으로 - 어디에나. 있는 줄도 몰랐는데 빠지면 허전하다. 나이젤라 로슨이 앤초비에 느끼는 만큼 멸치에 엄청난 애정을 갖는 사람은 없더라도, 멸치맛의 부재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의외로 많을 것이다.
서양에서도 앤초비는 곧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칠맛을 내주는 보조적 역할을 하지만, 살만 발라져 오랜 기간 소금에 절여진 만큼 그 짠맛이 강렬하기 때문에 앤초비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사람은 종종 정면에 드러나는 짭조름한 존재감과 마주한다. 토마토 파스타나 크림소스에 아주 조금만 넣어도 음식의 성향과 캐릭터까지 바꿔버리는, 숨기기엔 너무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필요한 공정을 거쳐 통조림이나 병조림의 형태로 멀리 날아온 이 '유럽 식재료'는 우리 밥상에 늘 오르는 식재료와 같은 생선이라고 하기엔 낯설고, 우아하고, 고급지며, 비싸다.
한국에서 앤초비 생산은 어려운 일일까?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홈메이드 앤초비'에 대한 글을 읽었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062918/1) 이 글을 쓴 김민경 칼럼니스트는 '흘러가는 계절을 병 안에 꼭꼭 잡아두는' 저장 요리이기 때문에, 통통하고 신선한 제철 생멸치만 준비해도 반은 성공이라고 한다. 멸치는 봄이 제철인데 올봄에 잊지 않고 부지런하게 생멸치를 사서 도전해 볼 수 있을까. 직접 절여 기름에 담근 앤초비가 천천히 삭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것 같다. 철을 놓치지 않는 것이 포인트겠다. 봄은 언제나 시작되는 듯하다가도 금방 기척 없이 사라지니까.
나이젤라 로슨의 책을 읽고 나서 앤초비가 저녁 식탁에 한창 오르던 시기, 하루는 남편이 급조해 만든 파스타가 히트를 쳤다.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애호박 한 토막과 마늘, 홍고추를 넣고 만든 링귀니였는데, 물론 앤초비를 올리브유에 데우는 데서 시작한다. 애호박이 부드럽게 익으면 마치 버터와 같이 크리미하면서 고소해지는데 앤초비의 감칠맛과 훌륭하게 어우러진다. 먹을수록 입맛을 돋우는 이 조합은 어딘가 친숙했는데, 생각해보니 엄마가 잘해 주던 애호박나물과 비슷한 맛이었다. 멸치국물을 졸여내 흐물흐물 부드러워진 애호박나물. 늘 식탁에 오르던 반찬이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내가 멸치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