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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을마음 Jul 04. 2020

오늘 읽을 책을 고르지 않는다

책방에 도착하면 오늘 포장할 책들을 카운터에 쌓아 두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손님이 많은 가을에는 주문한 책들이 도착하는 대로 바로 포장 작업에 들어가지만, 한여름 또는 한겨울에는 때때로 포장 업무를 몇 날 묵혀두었다가 한꺼번에 처리하기도 한다.


내가 하는 책방은 블라인드 데이트 북 전문 서점이다. 제목도 저자도 알 수 없는, 포장된 상태라 읽어볼 수도 없는 책이 가득한 독특한 서점에서 나는 모든 책들을 포장하고 거기에 날짜를 붙인다. 바로 작가의 생일이다.


하루하루 작가의 생일을 기념하는 곳. 방문객이 이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책은 평소라면 절대 집어 들지 않았을 책일지도 모른다.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는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최종 선택에서 손님 몫의 고민을 덜기 위해 책마다 책 속의 문장과 힌트 키워드를 넣어두었다. 방문객은 자신의 생일이나 친구의 생일에서 몇 권의 책을 발견할 수 있고, 다른 서점에서 하지 않는 새로운 고민에 빠진다. 나에게 익숙한 장르, 구미가 당기는 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데 궁금한 책을 선택할 것인가.


책방의 하루 또한 다른 동네서점과 많이 다르다. 책을 주문하고 청소를 하고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서점 주인은 생각보다 많지 않겠지만, 아침부터 오후까지 책 포장에 몰두하는 서점 주인은 나 하나뿐이지 않을까. 팝업스토어로 연 다른 지점에서는 포장상자를 이용해 책을 준비하지만, 내가 있는 본점에서는 항상 수작업으로 책의 커버를 싼다. 책을 구입하는 분들을 위한 최소한의 마음과 정성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작가의 생일을 기념하는 곳. 이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책방을 열기 한참 전부터 지금까지 반복하는 작업이 있다. 바로 새로운 작가의 생일을 수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권의 새 책이 출간되고, 그중 최소한 '책'이라고 불러줄 만한 가치를 가진 물건들이 인터넷서점 신간 코너에 올라온다. 그렇게 인터넷서점 MD의 도움을 받은 나는 그중에서 (학습지와 어린이 동화책 등을 피하며) 나와 우리 책방의 독자들이 관심 있을만한 책들을 인터넷 창 새 탭 위에 띄워 둔다. 


보통 하루 열 권에서 많으면 서른 권까지의 책이 이 작업에서 선정된다. 하지만 이 중에 책방의 생일책 리스트에 들어가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출판사의 책 소개와 저자를 보며 '속았다!'라고 느끼고 창을 닫는 책이 절반 가량이고, 남은 책 중에 주문해서 읽어볼 만한 마음이 드는 책들을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의 생일을 검색한다. 검색을 통해 작가의 생일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은 바로 리스트에 추가하고 책을 주문하고, 작가의 SNS나 출판사, 에이전시를 통해 연락이 가능해 보이는 책들은 책방과 책방 컨셉, 사진을 담은 메일을 전하고 연락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렇게 해도 접촉이 어려울 것 같은 책들은 다른 서점에서 인연이 닿기를 기원하며 미련을 버리고 보내 준다.


새로운 책을 탐색하는 흥미진진한 시간을 마치면 이제 노동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생일책을 포장할 시간이다. 고급 양장제본에 사용하는 종이로 책들을 감싼다. 

 조용히 포장 작업에 들어간다. 쌓아 둔 책들이 새 표지를 입는 것도 슬슬 속도가 붙을 무렵, 나는 노동을 멈춘다. 새로 들어온 책을 포장할 시간이다. 포장을 위해서는 책을 읽어 보고 책 속의 문장과 키워드를 새로 찾아 프린트해 포장지에 붙여야 한다. 오늘 오전 포장은 여기까지. 나는 새로 생일책에 소개될 책을 펴서 읽는다.  고객이 원하는 책을 고르지 못하는 서점. 편식을 할 수 없는 이 서점에서 나 또한 그날 읽을 책을 직접 고르지 않는다. 과거의 어느 단계에선가 내 손으로 고른 책이겠지만, 읽는 것은 다가온 순서대로, 취향과 관계없이 읽게 된다. 내가 읽을 책이 아니라 '내게 온 책'이다.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는 같은 표지, 같은 내용의 책이지만 책방에 방문한 손님들은 이제 이 포장된 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원하는 책을 사러 가는 서점이 아닌, 생각지도 못한 책을 원하게 되는 서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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