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레 Jun 23. 2022

소소하고 신비한 순간들

친정집에 다녀왔다. 수원의 쾌적한 아파트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풀을 뽑을 일도 없고, 신경 쓸 것도 모두 사라졌다. 그저 반듯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일상을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틈틈이 문득 땅이 고프다는 마음이 올라오곤 했다. 마당이 없으니 조금 갑갑한 것 같기도 하고 아파트 살이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인상을 받았다. 내가 땅 맛을 제대로 봐버렸나 보다. 이러다가 손이 닿는 땅은 내 삶의 필수요소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며칠 만에 다시 찾은 시골집이 약간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 주변의 야생성이 확 느껴지며 새삼스럽게 약간의 공포스러움을 느꼈다. 계속 쭉 살고 있을 땐 몰랐는데 도시에서 며칠 지내다 오니 울창한 산과 무성하게 움트고 있는 무언가의 기운이 나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시골에는 생생한 에너지가 있다.


나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오기 힘든 곳인데. 공기도 좋고, 이웃과의 거리도 적당한 느낌이다. 마치 하늘이 나를 콕 집어 이곳에 데려다준 것만 같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참으로 귀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라기보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것 같았던 날


우리 마을의 몇 안 되는 집에는 사려 깊은 사람들이 산다. 시골에는 텃세가 있다던데. 그런 것 1도 느끼지 못했다. 모두들 친절하고 적당히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다. 번쩍이는 서울 역세권에서 살다가 정말 180도 다른 외딴곳으로 온 것은 극단적인 변화였다. 그래도 삶의 만족도가 높은걸 보면 잘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내내 가지고 있었던 자연적인 갈증들을 모두 충족시켜주고 있다. 주택은 몸소 경험해 봐야 한다기에 전세로 왔지만 틈틈이 이 집에서 계속 살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놀라운 우연


이 작은 곳에서 예전에 인도를 여행할 때 만났던 언니를 만났다. 2005년에 한 번 그리고 2008년에도 맥그로드 간즈라는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매번 우연히 J 언니를 만났었다. 놀랍게도 언니는 나의 첫째 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였다. 학교 앞에서 엄마로서 인사를 건네다가 어느 날 딱! 서로를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정말 놀라운 우연이고 인연이다. 신비하고 반가운 재회였다. 이곳은 정말 학생수도 적고 사람들도 적은 곳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구나.


오늘은 언니네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을 했다. 이곳에서 이미 5년 넘게 살고 있는 언니의 말로는 이곳은 아주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저 소신껏 행동하고 이사했을 뿐인데. 이렇게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다니 내가 이곳에 올 운명이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발아


땅에 직접 파종한 씨앗들이 발아를 해서 자라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심어 보는 농작물이다. 설명할 순 없지만 신비하고 행복감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작은 뒤뜰이 있었는데 어린 나는 혼자서 삽으로 흙을 갈고 손수 화단을 만들었다. 식목일이 되면 나무 대신 꽃집에서 꽃씨를 사다가 심었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어도 혼자서 본능적으로 했던 행동들이다. 해마다 화단을 만들었고 꽃은 정말 잘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DNA 어딘가에 이 근원적인 행복을 찾는 방법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씨앗과 땅을 만나서 행복하다. 그리고 정말 신비하다. 나는 땅에 씨앗을 심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구나_직감이 맞았다.


더 이상 마트에서 상추를 사 먹지 않아도 된다. 마당에서 쑥쑥 자라나는 상추. 그저 씨앗 한 톨을 심었을 뿐인데 내가 이렇게 많은걸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풍성하게 자라나는 작물들이 놀랍다. 매일 상추를 따다가 쌈을 싸서 먹는다. 갓 딴 농작물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이런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분명히 건강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단호박
긴 호박
상추
라벤더


온라인 상에서 씨앗을 나눠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이번에는 구억 배추씨앗과 꽃씨들을 나눔 받았다. 그분들도 씨앗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행복한 과정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리라 생각한다. 나도 씨앗을 정성스레 기르고 채종에도 성공하여 다시  씨앗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씨앗을 나누고 싶은  욕구인간이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아주 고유의 본능 같은  같다.


구억 배추 씨앗


낯선 곳에 덜컥 오게 되었지만. 인연이 인연으로 이어진다. 물줄기가 흘러가듯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신비하다. 발아에 실패했나 싶었던 작물들도 비가 몇 번 오더니 쑥쑥 자라나기 시작한다. 정말 힘차게 자라고 있다. 장마를 앞두고 무더운 여름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녹음의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