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호 Jul 15. 2021

<랑종>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스포 주의>


처음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떠올랐다. 신은 너무 멀고 악귀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또한 신앙인이면서  부적이나 비방으로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했던 언니와, 당이면서도 신이 곁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우는 동생을 보며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흔들리는 존재이며 그런 존재가 가진 믿음이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생각했다.


그렇지만 신은 먼 듯하면서도 참으로 불가해한 방식으로 자신의 자비와 징벌을 행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그 먼 법이 자신의 곁으로 내려와 주먹으로 악귀를 짓이겨주길 바라겠지만, 오히려 필패의 잔혹한 운명 속에서 조용히 거두어간 <님>의 목숨은 라이따이(수면 중의 죽음)라는 형태로서 나타난 신의 자비가 아닐까.


용서를 빔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언니는, 그 용서마저 딸을 구하고자 이 신, 저 신에게 빌다 못해 어설픈 내림굿마저 하던, 지푸라기 같은 방편의 하나였기에 용납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아벨의 제물만을 용납하고 카인의 제물을 용납치 않던 하나님처럼.


신은 결코 인간이 바라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간이 바라는 그 모습이 무한한 자비일지라도 결코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나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니라."라는 말씀처럼.


그러니 악귀를 누르는 자리에 나타나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신이 아니며, 그렇게 악귀와 주먹을 맞대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신이란 참으로 높고 멀다. 그는 불가해한 방식으로 행하신다.


나는 영화를 보며 <님>에게 큰 인상을 받았고 은연중에 응원하게 되었은 즉, 그녀의 죽음이 그 불가해한 자비 속에서 편안했길 바란다. 아니, 이 영화 안에서 목도한 죽음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관람객과 등장인물 모두 악귀가 퇴치되기를 아무리 한마음으로 염원하고 기대해도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바라는 방식대로는.


다만 악귀만은 주먹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마구 밀어닥칠 뿐이다. 믿고, 안 믿고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하건 간에. 신에 대한 그것조차 굳건하지 못한, 우리의 믿음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듯 입하고 엄습한다.


아니 결국 신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지. 자비도 징벌도 내리지 않고, 그저 그렇게 보고 해석하는 인간만이 있을 뿐인지. 혹은 신조차 없는지. 그렇게 아무것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나라는 믿음 없는 인간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조차 없는지. 그렇게 세상엔 믿을 게 하나도 없는 것인지. 믿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조차 믿을 수 없는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어쨌든 혼돈의 한 자락이라도 이끌어 낸다는 것은 재능이 아닌가.


또한 보는 내내 <>이 불편하고 싫었으므로 그러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자아낸 배우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일부 표현들이 불필요한 수위란 생각은 드나, 그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영화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드는 것에서 그 특유의 재능을 잘 발휘했다는 생각.


특히 누가 봐도 빨간색이 아닌 차에 '이 차는 빨간색이다'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의 의미는? 결국 위험한 퇴마를 강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의지 혹은 고집)과 관련된 것이 아닐지. 모두가 아니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유쾌하지 않아서, 어쩌면 매우 불쾌해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그런데 그 강한 인상이 전부 불쾌함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닌, 그런 영화였다. 더불어 아는 맛이 더 무섭단 말처럼 예상대로 전개되는 화면이 더 무서운, 그런 영화.



작가의 이전글 사랑이 풍화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