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도피한들 제자리라는 걸 알고 있는데, 나는 딱 거기까지만 알았다. 그래서 배수의 진에 있는 자신에 대한 막막함밖에 몰랐다. 그 절박함으로 어떻게든 극복해가면서도 그것을 음미할 줄 몰랐다.
결국 해낼 거라면, 살아있는 한 그걸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거라면,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분명 이 고통은 그만한 해방감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고통 자체를 즐기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미미한 쾌감의 향기와 맛을 날 선 감각으로 음미하며, 감지하며. 결국 도망가지 않을 자신을 알고 있으니, 거기엔 스스로를 몰아넣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자신에 대한 예감또한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