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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Apr 09. 2024

노란색 벽지

모든 색은 아름답다

아파트에 벽지를 교체하려고 하는데 벽지업체 사장님이 자꾸 흰색을 권하며, 내가 고르는 색마다 의구심을 품는다. 내가 사는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왜 벽지를 시공하는 사람이 자신의 취향을 강조하는지 알 수가 없다. 취향의 문제뿐만 아니라, 벽지를 여러 색을 쓰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둥, 작업이 번거롭다는 등,  거주자의 취향이나 공간의 중요성보다는 작업자의 편리함과 형편없는 취향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본인들은 하루 시공을 끝내고 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 공간에서 여러 해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색을 여러 개 쓰든 말든, 그것은 어차피 발라야 하는 벽지 시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뿐더러, 공간을 꾸미는 것은 그 공간에 사는 사람 맘이며, 벽지가 더 들면 돈을 더 내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벽지작업을 하는 시공에 전문인지는 몰라도 공간과 인테리어적 감각에는 예술가인 내가 비교할 수 없는 전문가가 아닌가?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평준화해서 벽지시공 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춰서 주거환경이 돌아간다는 게 전국적인 트렌드라면, 이건 정말 놀랄만한 일이다. 


대부분의 아파트를 보면 놀랄 만큼 일률적인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집을 방문해도 거의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소위 말해 한국적 아파트란 소비 수준을 막론하고 장식장 위에 티브이를 놓고 미적 감각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둔한 가죽소파를 다른 벽면에 두는 게 끝인 듯하다. 그러면서 더 이상한 일은 외부 커피숍이나 매장인테리어는 상당히 개성 있고 기발한 것들로 채워져 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공간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앉아 있다는 것이다. 남을 위한 공간의 취향은 참으로 감성적이고 다양하면서 사는 집은 왜 이리 변하지도 않고 다들 천편일률적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누군가가 '집도 카페처럼, 상가처럼 자신의 취향을 최대한 살려서 살아도 돼요'라고 허락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지루하고 불행한 듯 살아가는지 대다수 한국인들의 아파트를 보면 알 수 있다. 아파트 값은 말도 안 되게 비싼데 들어가 보면 솔직히 인테리어의 미적감각은 100점 만점에 '무'에 가깝다. 안 그래도 똑같이 닭장같이 생긴 아파트에 번호를 매겨 양계장 닭같이 사는 것도 지루한데, 그 안의 공간만이라도 사는 사람의 취향이 반영되면 단언컨대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몰라서 못하는 건지,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가 오래 앉아있고 싶은 집은 사실 많이 없는 듯하다. 심지어는 잘 알려진 연예인들의 아파트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촬영물을 보면서도 너무나 평이하고 취향이 없는 실내 공간을 보고, 돈을 저렇게 버는 사람들도 저렇게 비루하게 사는지 놀랐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둔탁하고 개성 없는 가죽 소파, 거실 티브이, 침대, 대부분 그게 다이다. 


작은 취향의 추구가 삶을 윤택하게 만들 텐데, 이러니 사람들이 예술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것일 듯하다.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일 텐데도 집에 그림 하나가 있는 집을 거의 못 봤으며, 그림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해바라기나 사과 같은 싸구려 촌티가 쫄쫄 나는 그림이 그나마 신발장 위나 엉뚱한 곳에 걸려있을 따름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자주 그저 평범한 다양한 아파트 등의 매물등을 검색해 보거나 방문해 보거나 하는데, 하나같이 주거환경의 패턴이 비슷했다. 특히 요즘 짓는 아파트는 안 가봐도 어떤 벽지에 욕실에는 어떤 색의 타일을 썼는지까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 모든 미적인 삶의 취향과 여유를 극복할 만큼 중요한 것이 사람들한테는 그저 몇 평수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가 다 인듯하다. 양적인 외양만 고려하고 삶의 질적인 내면을 가꾸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느끼는 거지만, 많은 한국사람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 작은 즐거움, 작은 취향, 내 것, 작은 취미, 이런 것들이 있다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어쩌다 미국에서 학부와 대학원 시절을 모두 보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삶의 질적인 작은 즐거움과 취향에 대해 눈을 뜬 건지도 모르겠다. 학부 때에는 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기숙사라고 생각하면 한국의 군대와 같은 단체 숙박시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있던 미국의 기숙사는 매우 현대식의 깨끗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서 당시 한국에만 있었을 때는 몰랐던 한국의 주거환경의 초라함이 마음속에서 비교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방학 때만 머무는 곳이라도 각각의 기숙사의 방은 정말 매우 감각이 있는 개성 있는 공간으로 변한다. 인테리어 감각을 어디서 그렇게 익혔는지, 평이한 방이 정말 예쁘고 다양하게 변했다. 잠깐 있는 곳이라고 대충 살지 않고, 꽃이며, 사진, 벽면의 장식물 등, 각각의 기숙사 방을 돌아다니면서 방을 구경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고, 그때 나는 그런 것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같은 공간이라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라든지, '하루를 살더라도 대충 살지 말아야겠구나'라는 것 등이다. 취향은 돈으로도 메이커로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자기가 없으면 안 되고, 그게 없으면 사실 삶에 재미가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희한하게 그 많은 아름답고 저렴한 식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유학생들의 사는 곳을 방문하면 거의 똑같은 무늬 없는 코랄 식기에 똑같은 가전제품에 한국의 아파트에서와 똑같은 인테리어를 하고 취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필요한 것들만 구비하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는 꽤나 살았던 사람들이었을 텐데, 비싼 가전제품, 차량, 외출할 때 치장할 화장품 등, 소위 말하는 '메이커'가 드러나는 어떤 것을 구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작은 부분에서의 취향의 개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한국 유학생들의 집을 '구경하려고' 방문했던 적은 거의 없던 것 같고, 가서 보면 원래 있던 모양새에서 별 볼 것도 없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게 '촌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취향은 없고 제조사의 태그로만 꾸며지는 삶이란, 정말로 '촌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부 때에는 시애틀에 살았는데, 에버랜드의 튤립축제가 기억의 전부였던 나는 온 천지가 봄이면 튤립과 갖가지 꽃으로 뒤덮인 동네를 보고, 이후 튤립축제가 시시해 보였다. 그 꽃들은 모두 집집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꿔놓은 화단이었고, 동네에 있는 모든 집들이 전부 예쁘고 개성이 있어서 동네를 걸어 다니면서 집구경을 하는 것이 주말의 큰 낙이었다. 집의 크고 작음과 화려함,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거기에는 각 개인의 취향과 삶이 아기자기하게 곳곳에 애정 있게 녹아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자신의 주변과 작은 것을 소중이 하는 삶, 그런 게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집은 단순히 잠만 자고 실용적인 것으로만 채워진 초라한 곳, 남의 사업장과 직장, 즉 타인의 삶과 꿈과 욕구가 개인의 욕구와 취향보다 우선시 되는 곳, 그래서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불행하다. 타인의 꿈에는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삶은 뭔지도 모르는 삶, 그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불행의 근원이다. 장담컨대, 아닌 사람은 거의 못 봤다. 거의 우울증에 빠져있다. 나의 취향에 빠져있으면, 우울할 틈이 없다. 


나는 노란색과 분홍색 그리고 부분 부분 이와 매치되는 다른 색으로 그러데이션을 주어 벽지 교체를 계획했다. 내가 노란색과 분홍색에 대해 언급하니 두 업체에서 똑같이 '아이 방이냐?'라고 물었고, 집에서는 '어린이집이냐?'라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나는 나의 취향에 대해 판단을 하는 것에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났다. 색채에 무슨 연공서열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노란색과 분홍색은 자연에 있는 색이며,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요즘 지천인 분홍색 벚꽃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집의 벽지를 분홍으로 하면 어린이방이냐고 묻는 그 모순된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튀튀 한 색을 좋아하든 말든 상대의 취향을 존중한다. 하지만, 어떻게 개나리색, 진달래색, 튤립의 색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거나 튀튀 한 것보다 더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성인이 되면, 노란색을 쓰지 않는다는 공식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러면서 왜 계절마다 화려한 꽃들은 찾아다니고 민트색 카페와 버터색 커피숍의 벽에는 열광하는 것일까? 유명 갤러리나, 대사관의 집이나,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의 관저의 벽면 색(기사에 나와있다. 찾아보시길!)도 다 제각각이고 방마다 다르다. 그리고 거기엔 다 개인의 취향과 이유가 녹아있다. 한국에는 왜 똑같은 몰딩과 벽지만 쓰는 것일까? 대량생산의 자본주의에 세뇌와 가스라이팅을 당해 개인의 취향을 제압당하고 '색채맹', '감성맹'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왜 자신이 살 곳의 벽지의 색을 벽지시공자에게 내맡겨지도록 하는가?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 감히 나의 오랜 취향과 전문적 감각을 벽지를 붙이는 시공자의 편리함으로 대체되게 하다니!


나는 살면서 진한 붉은색,  초록색, 푸른색, 노란색, 민트색, 분홍색, 벽지를 바른 온갖 집들과 방을 다 구경한 적이 있다. 그들은 어린이집 교사도 아니었고, 10대도 아니었다. 방뿐이랴, 집의 색과 지붕의 색도 다 다르다. 그게 사람이다. 돈 안 되는 취향을 지니고 사는 생명체, 그게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고 연료만 주면 움직이는 기계와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업체에서 제공하고 업체의 편리에 따라 끼워 맞춰지는 부품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파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형편이 되면 내 취향의 건축물을 갖게 될 것이며, 같은 아파트라면 오래전 기숙사에서처럼 나라는 사람의 개인성과 개별성이 존중되는 나만의 실내공간 정도는 영위하고 싶다. 흰색류의 벽지를 바르지 않는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이런 순간들이 정말 내가 속한 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중증 정신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여, 제발 죽기 직전까지 맘껏 온갖 색채를 즐기라!'라고 말하고 싶다. 벽지를 다른 색으로 한다고 대단한 큰일이 나지 않는다. 죽기 전에 흰색벽지를 바른 집에서만 사는 삶은 정말 불행한 삶이지 않을까? 이것도 발라보고 저것도 칠해보고, 신문지나 잡지를 뜯어서 붙여보기도 하고, 심지어 나는 그냥 회색 시멘트 노출벽으로도 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돈 안 되는 작은 취향과 모험이 있어야 삶이 풍요롭다. 불행해하지 말고 우울한 사람들은 제발 돈이 아닌 것에 숨어있는 삶의 재미 좀 찾아보라고 사람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다. 제발 줘도 안 입는 진하고 궁색 맞은 색채의 등산복만 입고 중년 이후를 보내며 산책로를 돌아다니거나 기차역에 모여 여행을 가거나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자연은 각기 자신의 색채를 뽐내며 계절마다 조화롭게 존재하는데 색채를 즐기지 않을 까닭이 없다. '취향을 찾으라, 자신만의 색을 찾으라, 그리고 표현하고 발산하라'라고 소리치고 싶은 날이다. 


PS: 그런데 도대체 대부분 중년 이상이신 분들은 왜 이렇게 진한 벽돌색, 튀튀 한 청색, 짙은 고동색 같은, 쓰다 버린 색을 다 섞어서 색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듯한 색들, 싸구려 우산 같은 색으로 만들어진 등산복을 입고 생활을 하시는 걸까? 주말 오전에 지하철이나 심지어는 해외여행을 떠나도 다들 비슷한 복장으로 다니는 이유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그게 좋은가? 예쁜가? 싸구려 우산을 찢어서 옷을 만들어 입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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