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추운 날...
지난 미국 전시에서 알게 된 지역 미술작가이자 지역 고등학교 선생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내게 “I feel like I become myself when I am with you (너와 있으면 내가 되는 거 같아)”라는 말을 해주면서 짧지만 강한 유대감을 느꼈던 친구이다. 그건 정말 베스트 친구이거나 솔메이트와 같은 결을 느꼈을 때 내가 쓰는 말인데, 그녀가 그렇게 내게 말해줘서 놀랍고 고마웠다. 그런데 사실 난 별로 한 게 없다. 그냥 만나서 서로 단번에 친해졌다.
나는 대개는 이렇게 단번에 친해지거나 아예 관계를 맺지 않거나 하는 관계가 많다. ‘친구’라는 말이 완전히 적절하진 않은데, 그렇다고 객관적인 ‘작가’보다는 그 이상인 것 같고, 그렇다고 단지 ‘지인’이라 하기엔 너무 섭섭한 단어이다. 그래서 그냥 친구란 말을 쓴다. 친구가 되어가는 중이다. 만나서 그냥 통했다. 소울이 통하는 관계라고나 할까. 미국에서는 지역마다 이런 솔메이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맺어진 관계?)적인 친구들이 하나씩 있다. 오래 만나지 않았는데 영혼이 뭔가 착 달라붙어 떼어지기 어려운 가지가 된 것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
전시장을 돌아가기 싫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교회 담을 넘어가고 (나는 훌렁 넘어왔는데, 그녀는 담을 못 넘어가서 나만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담장을 넘어갔다. 무용을 하고 있는 게 이럴 땐 참 편리하고 좋다), 길가 주차정산 미터기에 넣은 동전을 먹어버려서 어렸을 때 동전만 먹고 검볼(gumball)은 나오지 않았던 사탕자판기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길에서 둘 다 씩씩거리다가 깔깔거리면서 한참을 배꼽을 움켜잡고 웃기도 했다. 갑자기 그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킥킥거리다가 그녀가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내게 마지막날 준 본인이 직접 쓴 책을 식탁 위에 그대로 올려둔 게 생각이 났다. 그녀는 몸이 아주 건강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자신이 겪은 증상에 대한 글을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나는 아픈 것도 아니고, 왠지 나와 관련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친구와의 기억의 징표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와의 일들이 생각나서, 책을 펼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먼저 읽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책의 제목은 “I Have Fibromyalgia but it Doesn’t Have Me!”이다. 한글로는 '섬유근육통?'이라는 만성 피로 증후군과 비슷한 종류의 병명(의학적으로는 구분되지만 환자 경험에서는 함께 묶여 언급되기도 한다)이다. 나는 이런 병명을 들어본 적이 없고, 단순히 병을 겪은 예상 가능한 수기이겠거니 싶었다. 물론 본질적인 내용의 주축은 그런 것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병적인 증상이 담긴 그런 글이 아니었다. 글은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시처럼 읽히기도 하면서, 누구나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갈등과 갑작스러운 불행한 일들을 겪어내는 한 사람의 결심과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잠을 일찍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려고 하던 결심이 또 깨졌다. 잠깐 본다고 넘긴 책장을 2시까지 침대 위에 엎드려 넘기게 되었다. 물론 밤을 새우는 경우 다음날 신체 컨디션에 많은 변화를 주기 때문에 아직 독서를 끝내지는 않았다. 불을 끄기 전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고, 아침에 보니 다시 친구에게 긴 문자가 와 있었다.
나도 몇 년 전 처음 병원에 가서 느끼게 된 것이지만, 병명을 진단한다는 것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매우 어려운 일인듯하다. 증상의 발현 이후 친구도 많은 검사와 의료기관의 다양한 오진을 겪고 마침내 침술을 시행하는 곳까지 가서, 그 의사로부터 같은 증상을 이겨낸 의사가 쓴 책을 하나 건네받고, 식이요법(Diet)에 들어가면서 증상이 완화되어 가는 그런 과정까지 읽게 되었다. 친구의 증상은 이렇게 묘사된다.
“I am alone. I am naked. I am in the bathtub. I am watching the water rise. I have no idea of how I got here. The water is warm and it is getting higher. I am afraid. I begin to laugh. My laughter fills the room and disguises my fear for an instant. Something is really wrong with me. I sense it, feel it, but I don’t know what to do… “ (Chantal K. Hoey-Sanders)
친구의 안타까운 증상과 별도로, 나는 친구의 문체와 작법이 매우 흥미롭고 은유적으로 느껴져서 금세 책에 몰입이 되었다. 책의 첫 쳅터 부분을 다 쓰기엔 귀찮아서 이만큼만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게 좀 안타깝다.
친구는 현지에서 만났을 때에도 계속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아주 덥지 않은 날씨에도 차 안에 에어컨을 켜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묘한 것을 경험했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감정의 전이가 잘 일어나는 편인데, 아무 일 없이 자고 일어나려는데 마치 그녀가 겪었던 증상의 느낌과 비슷한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책에 쓰여 있던 문장처럼, 나의 상태를 머릿속으로 읊조리고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난생처음 겪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일어나서 화장실도 가고 어제부터 먹고 싶었던 삼겹살도 구워 먹고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려 하니 블랙홀로 아찔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누워있다가 이런저런 문장들을 떠올리다가 천천히 기를 쓰고 일어나서 다시 스튜디오로 왔다. 남의 증상을 읽으면서 내게도 비슷한 증상이 전이가 되나 싶으면서, 한 편으로 걱정도 되긴 했는데, 친구가 느꼈을 그 느낌을 더 공감할 것만 같았다. 친구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했을지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춤을 추고 바른 자세로 12시 이전에는 편히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