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SLR 필름 카메라로 찍는 사진
이하게(Ihagee)는 독일의 카메라 회사입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한 때는 독자적인 구조를 갖춘 카메라를 내놨습니다. 엑사(EXA)는 이하게가 1951년에 처음 출시한 제품으로 초창기 SLR 카메라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SLR 카메라라고 하면 으레 펜타프리즘이 적용된 모델을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중형 TLR 카메라와 같이 그저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파인더 방향으로 반사해주는 거울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상하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좌우는 반대로 보였습니다.
당시 35mm 카메라의 대표주자는 라이카였습니다. 카메라의 구조는 RF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이하게는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한 구조를 갖춘 카메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블루오션을 찾은 것이지요. 이러한 구조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일본 카메라회사는 라이카의 '거의 완벽한' RF 카메라 라이카 M3를 보고 또다른 출구를 원했고 그 길을 SLR 카메라가 보여줬습니다. 일본 펜탁스(PENTAX)는 엑사와 같은 SLR 카메라에 펜타프리즘을 접목시켜 정립정상이 보이는 카메라를 양산했고 이것을 캐논, 니콘과 같은 카메라 전문 기업이 채택하면서 전세계 카메라 시장을 석권하게 됩니다. 결국 RF를 고집했던 라이카마저 자존심을 꺾고 미놀타와 함께 라이카 R 시리즈를 만들게 됩니다.
펜타프리즘이 없는 엑사는 허리춤에 카메라를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어야 합니다. RF 카메라처럼 초점을 체크할 수 있는 2중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후기 SLR 카메라처럼 스플릿 스크린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돋보기'를 펼쳐서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초점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카메라입니다.
요즘 카메라는 물론 스마트폰마저도 셔터를 누르면 자동으로 사진이 찍힙니다. 밝기, 포커스 등이 모두 자동으로 작동해서 촬영자가 따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엑사는 모든 것이 수동입니다. 밝기도 초점도 수동이고 카메라에서 아무것도 지시해 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촬영자의 감으로 조작해야 합니다. 정말 불편하기 짝이없고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촬영한 사진도 밝았다 어두웠다 들쭉날쭉 합니다. 물론 초점이 나간 사진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진 찍을 맛이 나겠냐고요? 그게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재미있습니다.
연남동 골목 끝에는 엘리카메라 라는 빈티지 카메라 샵이 있습니다. 인스타그램(@allycameras)과 홈페이지(www.allycamera.com)을 운영하고 오프라인 샵은 오후 3시부터 운영합니다. 하지만 오프라인 샵에 방문했다고 해서 카메라를 바로 구입할 수는 없습니다. 샵에 진열된 카메라는 주인인 엘리의 소장품입니다. 제품을 보고 예약을 하면 주인이 카메라를 수소문 합니다. 직접 해외 빈티지 샵에서 카메라를 구해오기 때문에 시간은 제법 오래 걸리지만 상태는 믿을 만합니다. 꼼꼼하게 살피고 좋은 제품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엘리카메라는 빈티지 카메라 판매 뿐 아니라 필름카메라 체험프로그램도 진행합니다. 주요 카메라는 엑사, 프락티카(PRAKTICA), 롤라이 TLR(Rollei TLR) 등입니다. 대부분 개성이 강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카메라들입니다.
엘리카메라의 필름카메라 체험프로그램은 워낙 인기가 있어서 공지가 올라오는 족족 마감이 되지만 이번에는 운 좋게 평일에 시간이 되어 엑사 카메라 체험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참가비는 겨우 3만원. 필름과 현상비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체험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카메라 사용방법을 알려주고 샵 주변을 돌며 샵 주인 엘리와 함께 몇 컷을 찍어보며 감을 잡습니다. 이후에 자유촬영을 한 후 돌아와 카메라와 필름을 반납하는 순서입니다.
프로그램을 듣고있으면 그가 얼마나 카메라를 사랑하는지 느껴집니다. 특히 엑사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강의자료는 그가 직접 손으로 그리고 글씨를 적어 만들었습니다. 프린트 자료마저 기념이 될 만하죠.
처음 카메라를 받아들고 깜짝 놀랐습니다.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습니다. 흔히 오른쪽 상단에 있는 셔터는 카메라 왼쪽 전면, 렌즈 위쪽에 위치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셔터를 눌러야 합니다. 필름을 장전하는 크랭크는 레버가 아닌 다이얼 방식. 촬영 후에는 오른손으로 열심히 다이얼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보통 SLR 카메라는 셔터가 장전되어 있지 않아도 화면이 보이지만 엑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면을 보려면 반드시 크랭크를 돌려 셔터를 장전해야 합니다.
다행이 렌즈의 초점링과 조리개링은 일반 카메라와 같았습니다. 다만 셔터를 왼손으로 조작하기 때문에 렌즈는 오른손으로 조작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왼손으로 초점을 맞추고 셔터도 눌러야 하기에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화면이 좌우가 반대이기 때문에 신속한 대응은 거의 어려웠습니다. 수평 수직을 맞추는 것은 물론 촬영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거의 뇌가 꼬이는 느낌이었죠.
초점을 잡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카메라 파인더에 탑재된 돋보기를 열어서 눈을 가까이 대고 촬영해야 했습니다. 목도 아프고 어지러웠죠.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냥 돋보기 없이 파인더만 보고 촬영했습니다.
사진 밝기도 카메라에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노출계로 확인했습니다. 아! 셔터스피드는 겨우! 1/150초가 최단 속도입니다. 1/150초, 1/100초, 1/50초, 1/25초 그 다음은 벌브 입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셔터속도는 4단계 뿐인 셈입니다. 그래서 야외에 나가면 F값이 16까지 올라갔습니다. 렌즈의 심도를 활용한 공간감 표현은 무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불편함은 실제 촬영에서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평평한 유리 파인더는 마치 입체영상을 보는듯한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이 파인더는 사진이 기록되는 필름과 거의 동일한 크기인데 이 1:1 비율이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필름 그 자체를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는 기분이 듭니다. 그 옛날 루페로 슬라이드 필름을 들여다보는 맛입니다.
수평 수직을 맞추기 어려운 좌우 역상은 신중한 한 컷을 요구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한 덕분에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자체의 근본에 다가간 기분이었습니다. 피사체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완성보다 대상과 나의 감정적 거리가 더 중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더 소중한 것만 담고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셔터스피드의 제한은 심도의 제한을 불러왔습니다. 거의 모든 부분에 초점이 맞는 팬포커스 촬영을 해야하는 덕분에 보케의 화려함에서 오는 일종의 눈가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면 전체를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해야 했습니다. 50mm F2.8 렌즈였지만 되려 더 광각 렌즈를 사용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묘한 촬영이었습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심지어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이 말만 하면 스마트폰이 작동합니다. 엑사는 이러한 시대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카메라입니다. 모든 것이 수동이고 불편합니다.
필름 한 롤을 이렇게 불편하게 촬영하다가 최신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드니 손발을 묶은 족쇄를 푼 것처럼 홀가분 합니다. 그런데 뭔가 셔터를 누르는 경건함이 사라진 듯합니다. 더 편해졌지만 오히려 값어치는 줄어든 느낌입니다.
본래 사진은 게으른 자들의 발명품이었습니다. 손으로 그리는 것보다 쉽게 그림을 만드는 방법이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카메라는 더욱 더 간편하게 그림을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지금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누르는 것 만으로 촬영에서부터 현상, 인화, 공유까지 이뤄집니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오랜시간 정성들여 그린 그림 한 장과 스마트폰을 촬영한 사진 한 장 중에 어느 쪽에 가치를 두고 싶으신가요? 만약 둘 중 하나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으신가요?
엑사는 사진을 어렵고 힘들게 찍는 방법이었습니다. 사진과 그림 둘 중 값을 지불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대답은 반대로 나를 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촬영한 사진 중에서 힘들게 찍은 것과 쉽게 찍은 것중 어느 쪽에 더 애착이 갈까요?
오랜만에 즐겁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엑사 덕분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어렵게 사진을 찍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꼭 엑사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조작해야 하는 오래된 카메라라면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러한 맛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