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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Dec 28. 2023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하는 거냐?

타이세이 건설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유명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NASA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달 착륙 계획을 수행 중인 NASA 시찰에 나선 대통령이 통로에서 흥겹게 작업을 하던 청소부를 발견한다. 대통령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데 이렇게 즐겁게 하고 있습니까?” 청소부는 유쾌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대통령님. 저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I’m helping put a man on the moon)”


온갖 음모론에 길들여진 눈으로 보면 실화인지 의문이다. 백악관 내부도 아니고 외부기관에 대통령이 시찰 중인데, 대통령의 이동경로에서 청소부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 그렇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별 하나만 떠도 군부대를 뒤집어 청소하고 준비된 것만 보여주는 일에 익숙한 한국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할 만하다. 게다가, 일을 흥겹게 하고 있다고 대통령이 저렇게 말을 건다는 것도 의아하다. 대통령과 시민의 만남 같은 것은 안전하게 기획하고 연출한 것이 당연한 나라의 국민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건 어쩔수 없다.


이런 삐딱한 시선을 거두고 알맹이만 들여다보면 멋진 이야기와 철학이 담겨있다. 이 일화는 전하는 목적에 따라 ‘긍정적 사고방식’을 설파하는 이야기가 된다. 또는 청소부까지 하나가 된 ‘조직의 사명감과 비전의 중요성’을 말하는 소재도 된다. 모두 말이 되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우리 광고인들은 ‘업의 본질’을 떠올린다. ‘업의 개념’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말한다. 기업이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일이 전혀 다른 가치의 일이 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포스코의 기업PR광고 ‘철이 없다면’ 캠페인은 업의 본질을 다르게 정의하여 성공한 대표적 광고이다. 광고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한 삶의 모습이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철이 있어야 할 부분들이 모두 지워져 있는 이상한 모습들이다. 그 희한한 광경은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 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상징한다. 광고의 엔딩 부분에 조용히 한 줄의 카피가 흐른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포스코의 업의 본질을 ‘철을 만드는 회사’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회사’로 바꿔서 표현한 것이다. 이전까지 철강회사인 포스코 하면 떠오르는 것은 포항의 거대한 제철공장, 용광로 같은 이미지였다. 이 캠페인이 성공한 이후 포스코는 그저 철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삶을 만들어 세상을 움직이는 높은 가치의 회사로 포지셔닝됐다. 철을 만든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 가치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기업의 이미지와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포스코의 광고 캠페인 성공 이후, 표면적인 업의 본질을 가치적으로 확장한 기업PR 광고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일본 광고의 사례는 어떨까. 일본의 광고 카피 중 업의 본질을 재규정한 문장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地図に残る仕事。
지도에 남는 일



일본의 대형 건설회사인 타이세이건설(大成建設)의 광고카피이다. 1992년 이후 인쇄광고와 TV광고등에서 줄곧 사용하고 있는 슬로건이다. 현재 타이세이건설의 홈페이지에도 커다랗게 적혀 있다. 일본의 여러 광고 관련 서적에서 일본 광고를 대표하는 카피로 소개하고 있는 명문이다. 일본의 카피 베스트 500(日本のコピーべすと500)이란 도서에서도 전후 일본광고카피 Best 100으로 선정했다.


초대형 건축 및 토목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회사의 카피답다. 짧고 단순하지만 이 회사가 하는 일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을 짓거나 흙을 파서 공사를 하는 회사가 아니다. 그 결과 지도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깊은 의미를 ‘지도에 남는 일’이라는 한마디에 담고 있다.


업의 본질을 가치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기업광고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개인의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가치 있는 일이 되기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생업이 되기도 한다. 바로, 케네디 대통령의 일화에 나오는 청소부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하찮은 일을 하는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는 ‘정신승리’에 불과하다고 폄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짧지 않은 시간을 광고업에 종사해 온 경험은 그렇지 않다고 일러준다.


광고회사에 입사하면, 자료를 찾거나 복사를 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자료를 찾는 것이 그 시작점이고, 이 일은 주로 신참들에게 맡겨진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색해 찾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주로 도서나 신문 스크랩 자료를 많이 참조했다. 하루 종일 복사기 앞에서 카피를 하고, 카피한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자신이 하고 있는 업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드러난다. “선배가 시키는 복사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는 사람과,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팀원“이라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같은 태도로 일하게 되지 않는다. 그 흔적은 복사지에도, 자료를 정리한 PPT 문서에도 드러나게 된다. 왜(Why)에 대한 답을 다르게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How)가 달라지는 법이다. 가치 있게 스스로를 규정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신참이 대체로 좋은 광고인으로 남는다. 광고일을 떠나게 돼도, 어디서든 쑥쑥 성장한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실존인물인지 의심되지만, NASA의 그 청소부도 그냥 건물을 청소하는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결국 '업의 본질'은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로 귀결된다. 어떤 생각을 머리 속에 가지고 일하는 지가 기업과 개인의 미래를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가끔씩 어른들에게 들었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하는 거냐?"라는 질타에는 다 깊은 뜻이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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