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스포츠 분야의 빅이슈는 단연 LG트윈스의 KBO리그 통합우승이었다. 서울을 홈으로 쓰는 인기구단이 이룬 29년만의 우승은 여러 가지 화제거리를 남겼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명승부도, 선대 회장이 MVP에게 주려고 남겼다는 억대의 롤렉스 시계도 초미의 관심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주목한 것은 염경엽 감독의 리더십과 전략이었다.
2023년 시즌을 앞두고 그는 많은 도루를 시도할 것이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시범경기부터 선수들은 감독의 의중대로 움직였다. 정규시즌이 시작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도루를 감행했는데, 팬들과 야구관계자들 사이에 찬반 논란이 일었다. 도루실패가 잦아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팬 커뮤니티에는 잦은 도루지시를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왔고, TV 중계화면에 ‘제발 그만 뛰라’는 피켓을 든 관객들의 모습이 잡히곤 했다. ‘자살특공대’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시즌을 통틀어 10개구단 중 최하위인 62.2%의 도루성공률을 기록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잘못된 전술이 우승으로 가려졌다고 평가했다.
이미지출처: 조선일보 홈페이지. https://www.chosun.com/sports/baseball/2023/04/29/SQ6S3LCOMB5IMTA2SZVRS3YR6Y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시즌이 끝난 후 염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숨겨놓았던 의외의 생각을 밝혔다. 많은 도루는 상대팀을 흔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 있는 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큰그림이었다는 것이다. 암흑기를 거치며 강팀으로 부상한 LG트윈스이지만, 결정적인 큰 경기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감독은 선수들이 실패에 대한 부담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했다. 다른 어떤 것 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문화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된 주장 오지환 선수도 감독이 요구한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로 인해 실패에 주눅들지 않고 도전적으로 선수들이 바뀐 것이 우승을 한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멋진 스토리를 들으면, 왠지 우리 마음 안에도 무언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왠지 나도 실패를 걱정하지 않고 도전해보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받는다. 하지만, 정작 고개를 돌려 우리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금 어깨가 움츠려든다. 우리는 오랫동안 실패가 좋은 자산으로 활용되기 보다는, 책임의 굴레가 되는 것을 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최선을 다한 실패를 독려하는 리더나 시스템을 만나는 것은 매우 희박한 확률을 통과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국민성?
그런 점은 옆나라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나 보다. 최근, 영국의 저술가 매튜 사이드의 책 <Black Box Thinking>이 <실패의 과학>(失敗の科学)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국에서는 2016년에 <블랙박스 시크릿>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다. 우연히 일본의 도서리뷰 유튜브 채널인 페르미 만화대학(フェルミ漫画大学)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접하게 됐다. 책 내용 만큼이나 일본의 실패문화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실패를 부끄럽거나 명예롭지 못한 부정적인 일로 받아들였으며, 서양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는 국민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결이 다른 듯 하면서도, 한국의 분위기와 비슷한 느낌이다. 예전보다는 많이 희석됐지만,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동아시아적인 정서가 여전히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광고는 시대와 가치관을 반영한다. 광고카피는 이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드러낼까. 2015년에 게재된 동경해상일동의 신문광고의 카피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실패의 사회론을 역설한다.
失敗をこわがる社会。 何度でも挑戦できる社会。 私たちの国は、今どちら側だろう。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회.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사회. 우리나라는 어느 쪽일까.
동경해상일동은 1879년에 설립되어 보험업계를 이끌어 온 기업이다.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대형 금융 기업이다. 일본 보험업계의 리더답게, 업의 본질에 대한 철학을 도전정신이라는 프리즘으로 해석한 광고를 많이 발표해왔다. “어떤 대기업도 시작은 벤쳐였다”, “보험은 모험에서 시작됐다”, “도전의 수만큼 보험이 있다” 등의 유명한 카피들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 광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심플한 디자인 위에 커다랗게 박혀있는 타이포그래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일본사회는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사회인가, 실패를 도전의 과정으로 감싸 안는 사회인가.
“경영의 본질은 실패의 허용”
이렇게 실패를 통한 도전을 강조하는 광고카피가 대문짝만하게 박히고, 실패를 긍정적으로 활용하자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일본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츠타야 서점의 혁신과 성공을 일군 마스다 무네아키(増田宗昭)도 자신의 저서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에서 ‘경영의 본질은 실패의 허용이다’라고 단언한다. 사람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실패를 할 수 밖에 없으며 기업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기업이 성장할수록 실패의 크기도 커지지만, 성장을 위해 피해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광고의 메시지는 10년 전의 일본 사회 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같은 무게로 전해진다. 한국 사회도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라고들 한다. 구글 검색창에 이 문장을 넣고 검색을 하면, 100만개 이상의 문서가 발견된다. 책마다, 언론사의 칼럼마다, 사람들의 블로그마다 ‘실패를 응원하는 사회’를 목놓아 주장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그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2024년은 우리 사회가 실패를 좀 더 품어 안을 수 있는 방향으로 한 발씩 더 나아가기를 꿈꾼다. 개인과 기업의 노력과 사회적인 협력이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다. 단순한 이상주의적 희망사항만은 아니다. 작년 프로야구 챔피언의 변화가 하나의 힌트다. 과감한 실패를 독려하는 감독의 비전에 따라, 구단은 연봉책정에 반영되는 고과정책을 바꿨다. 선수의 평가항목에서 마이너스 지표였던 도루실패와 주루사를 삭제한 것이다. 23개의 기록적 도루실패를 기록한 선수가 연봉고과 1위를 차지했다. 3억이었던 연봉이 5억원대로 뛰었다. 아마 2024년 시즌에도 이 팀의 선수들은 두려움 없이 뛸 것이다.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광고총연합회에서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광고전문잡지 AD-Z(광고계 동향)에 <생각을 깨우는 한 줄의 광고 카피> 라는 칼럼을 연재하게 됐습니다. 이 글은 그 첫 시작으로, 2024년 1/2월호의 칼럼에 게재된 것입니다. 편집팀과의 협의하에, 전문을 제 브런치에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