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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Apr 22. 2024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진짜 벽입니까

리쿠르트 브랜드 메시지 광고 (2017)

目の前に立ちはだかるのは
壁ではなく、
扉かもしれない。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벽이 아니라
문일지도 몰라.

- 리쿠르트 브랜드 메시지 광고 (2017)



“와, 송강호와 캡틴 아메리카라니!”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설국열차>가 처음 극장에 개봉됐을 때만 해도 한국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 한국배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들이 함께 등장해 연기를 하는 것이 큰 화젯거리가 됐다. 벌써 10년전 쯤의 일이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며 세상을 놀라게 하기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만든 작품이다.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반스 외에도 <나니아 연대기>의 틸다 스윈튼, <더 락>의 에드 해리스 같은 세계적인 대배우들이 출연했다. 국내에서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공했고, 작품성도 인정받아 해외의 드라마 시리즈로 이어졌다.    


영화는 빙하기가 찾아온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강추위로 지구가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자,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추고 전 세계를 횡단하는 열차에서 벌어진 반란사건이 이 작품의 큰 얼개이다. 그 안에 인간사회의 다양한 단면과 모순으로 스토리를 짜 올린 인상적인 작품이다.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꺼리로 가득찬 이 영화에서 특히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 명장면이 있으니, 크리스 에반스와 송강호의 대화이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가는 시점에 나오는 씬이다. 꼬리칸의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보안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에게 엔진실로 가는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남궁민수는 커티스에게 자신도 같은 것을 원한다고 말하며 앞칸으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 옆을 가리킨다. 남궁민수를 정면에서 바라보던 화면이 갑자기 주인공을 축으로 회전한다. 극적인 카메라 워킹과 함께 그의 손끝은 열차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향한다. 앞으로만 향하려던 커티스와 반란군에게 남궁민수는 생존을 위해서는 열차 안이 아닌 열차 밖으로 가야한다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보니까 이게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이 영화는 결국 반란군들이 열차에서 내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반란군 지도자는 물론, 관객들의 뒤통수까지 때리며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킨 것은 남궁 민수의 ‘당연한 것에 대한 의심’이었다. 이 영화 속에서 ‘당연한 사실’은 열차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남궁 민수는 창 밖을 통해 보이는 외부의 작은 변화를 감지해 모두가 포기한 외부 환경에 대한 가설을 가지고 있다. 바깥 세상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전제가 무너지면 그 사이에 놓여진 것은 더 이상 벽이 아니게 된다. 현실을 꿰뚫어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면,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남궁민수와 반란군은 다른 시각으로 얻어낸 해답을 자신들의 힘으로 현실화했다.


한계를 뛰어넘게 만드는 남다른 시각, <설국열차>가 전해주는 이 화두를 그대로 보여주는 카피가 있다. 일본의 취업정보 전문기업 리쿠르트가 2017년 7월에 게재한 온라인 브랜드 캠페인이 남긴 한 줄이다.


目の前に立ちはだかるのは
壁ではなく、
扉かもしれない。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벽이 아니라
문일지도 몰라.





리쿠르트는 전통적인 ‘광고 맛집’으로 유명하다. 도쿄 카피라이터즈 클럽 (TCC:Tokyo Copywriters Club)이 한 해 동안 발표된 최고의 광고 카피들만 모아 발행하는 <TCC 카피연감>에 매년 빠짐없이 여려 편의 리쿠르트의 광고가 등재된다. 그 해 최고의 카피에 수여하는 그랑프리도 여러 차례 받았다. ‘직업을 물으면, 회사 이름으로 답하는 녀석에게 지지 않겠다’, ‘기적은 우연을 가장하여 노력하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망설이고 있다면, 가슴이 뛰는 쪽으로’ 등의 명카피가 떠 오른다. 일본의 명카피를 소개하는 자료에서 이 회사의 카피는 늘 빠지지 않는다. 그런 리쿠르트인 만큼 온라인에 게재된 배너형식의 이미지 광고도 허투루 만드는 법이 없다.

2017~18년 사이에 펼쳐진 이 캠페인의 다른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이 광고의 비주얼은 다소 생뚱맞다. 메시지와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귀여운 아이의 이미지 위에 인사이트 넘치는 카피가 붙어 있는 심플한 구성이다. 대신, 취업 정보를 전하는 기업답게 카피의 내용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임팩트 있게 담고 있다.


현실의 벽을 문으로 바꾸는 방법


많은 취업 준비생들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원하는 취업자리는 늘 한정되어 있고, 강도 높은 경쟁이 동반된다. 자신이 처한 여러 조건과 한계 때문에 취업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런 취업 준비생들에게 이 광고는 말해 준다. 자신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밀어보지 않아서 벽으로 느껴질 뿐 그것은 문일 지도 모른다고.

설령 그것이 쉽게 열리지 않더라도 포기할 필요없다. 일상의 눈높이와는 다른 각도로 보면 기회의 문이 열릴 수 있다. 대개 단점과 한계는 정반대 측면의 장점과 이어져 있기 마련이다. 내향적인 성격은 꼼곰한 성향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산만하다고 지적받던 사람이 럭비공같은 창의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깊이의 부족은 넓은 커버리지라는 문을 열면 보이지 않게 된다. 왜소한 운동선수는 민첩함과 영리함으로 자신만의 문을 연다. 남다른 관점과 노력으로 장애물을 새로운 기회의 문으로 만드는 사례는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이것은 비단 취준생들만을 위한 도움말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느 자리에 있건, 여러 가지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눈 앞의 한계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은 흔히 벌어진다. 포기하지 않고 돌파하려고 한다면, 결국 방법은 똑같다. 밀어본다. 안 되면 관점을 바꿔본다. 그리고 다시 밀어 본다.


지금 눈 앞에 벽이 있다면, 그냥 돌아서지 말고 한번 밀어보면 어떨까. 한번에 열리지 않더라도, 다른 방향에서 힘을 주면 열릴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 앞에 있는 이 벽도 새로운 기회로 열리는 문이 될 수도 있다.




AD-Z(광고계 동향) 2024년 3/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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