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바론 인쇄광고 (2009)
9월부터 너무 정신없는 일정이 이어져서, 오랫동안 브런치에도 못들어왔네요. 외부 기고 글 덕분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11월 하순부터는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듯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 저 멀리 반대편에 피어오르는 신기루 사이에서 점 하나가 등장한다. 그 점이 조금씩 조금씩 화면을 향해 다가온다. 검은 색 전통복 차림으로 낙타를 타고 등장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아랍의 한 부족장이다.
1962년에 개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나오는 한 씬이다. 명배우 오마 샤리프가 연기한 이 등장씬은 20세기 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 마니아들은 이 작품을 반드시 대형화면으로 봐야 하는 영화로 꼽았고,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막씬이었다. 1998년, 충무로의 대한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70mm 필름 영화를 기념 상영했다. 그 작품이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거대한 화면에 점처럼 보이던 족장이 사막을 가로질러 눈앞에 나타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3분. 아무런 사건도 없이 3분 동안 작은 점이 눈 앞까지 나타나는 이 지루한 장면을 관객들은 가만히 앉아서 감상했다. 20세기의 일이었다.
시절이 바뀌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된다. 드라마를 보기 위해 방영시간에 맞춰 TV앞에 모이지 않아도 된다. 침대 위에서, 카페에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을 열면 그만이다. 이제는 OTT 앱을 켜서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감상한다.
바뀐 것이 영상을 보는 공간만이 아니다. 정속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지겨워진 시청자들은 재생속도를 높인다. 대부분의 OTT 플레이어나 유튜브가 제공하는 배속기능으로 빠르게 돌려보다가, 지루한 느낌이 들면 장면을 스킵하거나 다른 영상으로 옮겨간다. 요즘, 족장을 태운 낙타가 사막을 가로지는 3분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나타 토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에 소개된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연령대에서 영상을 빠르게 돌려보고 있다고 한다. 평소 영상을 아예 안 보는 사람을 빼고 계산하면, 동영상 관람인구의 절반 정도는 빠른 배속보기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언론에 소개된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평소에 1.5배속으로 콘텐츠를 시청한다는 20대의 한 직장인은 1년 정도 배속으로 영상을 보다 보니, 정속이 너무 느리게 느껴져, TV방송은 잘 안보게 된다고 했다. (2022년 1월 연합뉴스 기사)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데다, 콘텐츠는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 인기를 끄는 것이 유튜브 등의 편집영상이다. 긴 시간을 내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 않고, 짧게 편집해 놓은 영상만 보면서 주요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환경이 변했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배속영상, 편집 영상 그리고 숏폼에 열광하는 시대이다. 3분은 커녕, 3초만 지루해도 외면을 받는다. 영상산업에 발을 걸치고 있는 입장이지만, 영상의 의미나 가치, 창작자의 의도 같은 것을 애써 강조할 생각은 없다. 변한 상황에 맞는 영상문법에 충실하게 나의 일을 하면 된다. 그러나 아쉽다. 빨리 결론에 도달하는 것만이 모든 영상의 목적은 아니니까. 세상이 발전하면 과정의 의미는 점점 줄어드는 게 당연해지는 것일까. 10여년 전에 나온 광고 카피 한 줄이 생각났다.
旅の目的地が、
道だったりする。
여행의 목적지가
때로는 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오토바이 전문 판매업체인 레드바론의 인쇄광고 카피이다. 레드바론의 기업 목표는 ‘오토바이의 즐거움을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 1972년에 야마하 오토센터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오토바이 판매 및 라이더를 위한 숙박,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 왔다. 이 광고는 2009년에 TCC (Tokyo Copywriters Club)상을 받았다. 한 해 동안 일본에서 발표된 광고카피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에 주는 상으로, 대상격인 ‘그랑프리’ 다음 단계인 ‘최우수상’에 해당된다.
광고 속에는 앞을 향해 뻗어있는 길 위에, 세 대의 오토바이가 놓여져 있다. 포커스 아웃된 배경에 무엇이 있는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토바이가 놓여져 있는 각도로 보아, 그 곳이 가려는 방향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불명확한 목적지 쪽의 하늘 위에 심플한 카피 한 줄이 전부이다. 때로는 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라는.
다른 이동수단과 마찬가지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은 목적지가 있다. 그리고 정해진 목적지가 있더라도, 그 곳까지 가는 과정 자체가 오토바이를 타는 또 하나의 목적이 된다. 길 위를 달리는 속도의 즐거움, 라이딩을 하며 운전자가 느끼는 공기와 햇빛,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될 풍경과 사람들까지가 오토바이를 타는 이유이다. 목적지에 닿는 것은 과정이 가져다 준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레드바론의 카피는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의 진짜 즐거움을.
기술이 놀랍게 발전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과정의 즐거움이 흐려지는 것은 영상만의 일이 아니다. 한 페이지씩 넘겨가며 책을 다 읽지 않아도 클릭 몇 번이면, 책의 줄거리를 알려준다. 코드를 바꿔가며 멜로디를 만들면서 원하던 느낌을 완성하지 않아도, AI가 노래 한 곡을 뚝딱 만들어 들려준다. 대상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조금씩 형태를 만들고 색상을 칠해가는 과정이 없어도, 프롬프트 몇 줄이면 전문가의 작품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완성된 멋진 결과물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진짜 발전이고 진화일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득하게 영상이나 책을 감상하거나, 창작의 과정을 즐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미디어와 경험을 소비하는 방법과 태도가 다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3초 안에 느끼는 영상의 재미를, 3분 동안 사막을 보고 있는 즐거움과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빠르게 손에 쥐어지는 즐거움도, 시간을 들여 겪는 과정 그 자체의 기쁨과 함께 일 때 더욱 달콤하지 않을까.
한국광고총연합회의 AD-Z(광고계동향) 2024년 9/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