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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Dec 07. 2024

소년이 온다

01:05 am에 눈을 떴다.


오늘 블라칸의 Mt. Secret로 트레킹을 떠난다. 앙헬레스 SM mall에서 3시에 픽업한다 했으니 2시 반에는 숙소에서 출발해야 한다.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여는데 텔레그램에 많은 메시지가 있다. 숙소 안주인 앤이 보낸 것이다.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정 직전에 앤이 보낸 것이다. 트레킹이 오늘이 아니고 내일 일요일이란다. 공지사항을 확인하지 않아 엊그제 날짜가 변경된 것을 지금 확인했단다.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며, 선택은 두 가지다. 다시 잠을 청하든지, 일어나 책을 보든지.


다섯 시간을 자고 저절로 눈이 떠졌으니 잠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다. 억지로 잠을 다시 청하느니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는 일어나야 하니 생체리듬을 한시 기상으로 미리 맞추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실로 나와 커피를 타고 소파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필리핀 방랑을 떠나면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들고 왔다. 작금의 한국 상황(2024.12.03)과 맞물려 '소년이 온다'를 집었다.


소설 읽기 완벽한 상황이다.


거실창 너머는 완전한 암흑이다. 동트려면 아직 멀었다. 5시간을 자고 났으니 정신도 온전하다. 딱히 해야 할 일도 없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기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어렵고 난해한 구절로 소설이 시작한다. 열 페이지 정도는 넘겨야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거기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소설 읽기에 역치(threshold)가 존재한다. 역치를 벗어나자 1980년 5월 광주 상무관으로 내 혼이 이동했다. 시체냄새(시취)가 풀풀 난다. 까까머리 중3인 동호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계엄군 진압 직전 도청의 긴박한 상황 속으로 나 자신이 빨려 들어가면서 카스텔라와 김밥을 나눠먹는 동호, 은숙, 선주의 모습에 처연함이 느껴진다.


어르신이 되면서 눈물이 많아졌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을 자주 맞이한다. 노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낀다. 찡한 가슴속의 심장 박동이 순간적으로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냉정하게는 이 모든 것이 호르몬의 작용이다. 줄어든 남성호르몬 때문임을 알면서도 이 기분 나쁘지 않다. 뜨거운 가슴과 촉촉한 안구 표면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실존하고 있음을 나름 즐기고 있다.


05:45 am에 정전이 됐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인물들의 근황 속에 빠져있는데 사위가 암흑이다. 거실창으로 여명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하늘의 푸른빛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한다. 거실창 전체가 큰 액자처럼 아니 큰 그림처럼 다가온다. 먹먹하던 가슴이 진정되고 돋보기안경을 쓴 눈의 피로감이 엄습한다.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았다. 살아있음을 새롭게 다시 느낀다. 뛰던 가슴이 가라앉으며 깊은 심연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전기(와이파이)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거실 창이 완전히 밝아지자 책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작은 수영장(숙소가 풀빌라) 옆에 의자를 놓고 남은 부분을 끝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동호 엄마(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의 원망, 한탄, 후회, 분노, 절규로 소설이 끝났다.


광주의 아픔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광주의 슬픔을 이보다 더 잘 위로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이렇게 먹먹함을 주는 소설은 가급적 피해왔다. 소설은 상상이고 남의 상상에 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상상이 아니다. 실재한 사실을 소설가 한강이 서술했을 뿐이다. 시신을 닦는다고 살아나지 않는다. 염습을 하고 얼굴화장을 해도 시체는 현실이다.


숙소 안주인 앤의 터무니없는 실수 덕분에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노벨상 탈만하네, 단숨에 읽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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