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Wandering without destination) 중이지만 가끔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Outdoor Advantouritas(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61556632070129 )에 메시지를 보냈다. 주말에 트레킹 계획 없냐고? 빈자리 있으면 참가하고 싶다고? 몇 명이냐고 묻는다. 나 혼자지만 계획에 따라 친구가 참가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Mt. Secret with caving 트레킹이 이루어졌다. 한국 어르신 세명, 숙소 안주인 앤과 앤의 친구 디디. 다섯 명의 우리 일행과 마닐라의 참가자 한 명 포함 총 여섯 명의 투어 참가자다. 그리고 코디네이터 캣(Kat)이 이번 트레킹 인원 전부다.
자정 넘어 마닐라에서 출발한 미니버스가 앙헬레스 SM city Clark에 3:30 am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 다섯 명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가장 통행차량이 많은 마닐라-앙헬레스 간의 고속도로지만 이 시간에는 뻥 뚫려 있다. 그런데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운전기사가 좀 위태로워 보인다. 오른손으로 뒷목을 부여잡기도 하고, 갑자기 음악을 틀기도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내가 앉아 있는 뒷자리에서도 잘 보인다. 졸음이 몰려오는 것이다. 차선을 불안하게 넘기도 하고 추월선인 1차선을 계속 고집한다. 빵빵거리면서 다른 차들이 우측으로 우리 차를 추월한다. 1차선 우리 차 앞으로 갑자기 들어오면서 보복운전하는 SUV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든다. 일행 대부분 잠들었지만 난 잘 수가 없다. 내가 운전하는 것이 차라리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40분 정도 달려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지방도로다. 다행이다. 아무리 졸려도 온갖 지형지물과 오토바이를 주시할 수 밖에는 없으니...
한 시간 반 이상을 달려 여명이 보이기 시작하는 여섯 시경에 산 밑에 도착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둔 유원지가 보인다. 사리사리(구멍가게) 앞에 주차를 하고 운전기사는 드디어 누워버렸다. 완전 밤을 새워 운전한 것이다. 구멍가게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컵라면과 달걀 하나를 아침식사로 먹었다. 현지가이드가 도착하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20대 초반의 튼튼한 다리통을 짧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낸 여인이 따갈로그어로 산행을 설명한다. 숙소 안주인 앤에게 영어로 통역해 달라했지만, 원래 말수가 적은 앤은 대충 뭉갠다.
현지가이드가 제일 앞서 간다. 그녀는 목욕탕에서나 신을 법한 삼선슬리퍼를 신고 있다. K2 히말라야도 오를 수 있는 중등산화를 신은 내 발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땀이 좀 났지만 45분 만에 Mt. Secret 정상에 올랐다. 어렵지 않았다. 동네 뒷산 정도의 산행이다. 해가 뜨면서 점점 더워졌다. 정상부는 암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난 Nagpatong Rock( https://brunch.co.kr/@jkyoon/759 )처럼 험하지는 않았다.
정상의 뷰는 어디나 좋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산을 오른다. Arayat mountain은 가깝게 보이고, 아주 멀리 Pinatubo를 비롯한 이름 모를 화산들이 보인다. 오늘은 시야가 좋다. 구름사이로 가끔 해가 숨는다. 이 정도의 전망을 보기 위해 그렇게 밤새워 달려왔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 이 산에 Secret이란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허망한 기분이 든다.
Secret 이란 단어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비밀은 아주 은밀한 냄새를 풍긴다. 때로는 불법적인 불순한 내용을 감추고 있기도 한다. 누구나 말 못 하는 비밀이 있다. 아닌가? 죽을 때까지 갖고 가는 비밀도 있다. 아닌가? 나만 비밀이 있나? 'Secret'이란 이름을 가진 산을 간다고 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어르신이 되도록 살면서 갖게 된 모든 비밀을 이번에 싹 다 산에다 묻고 오자고.
'Secret free'로 거듭나자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7시 반이다. 거의 다 내려와 올랐던 길과 다른 길로 접어든다. 트럭이 다닌 흔적이 있는 넓은 길이다. 금세 앞에 하얀 산(White Rock)이 나타났다. 채석으로 많은 산이 잘려나간 흔적이 보인다. 지금은 사용이 끝난 대리석 채석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대리석을 채석하던 곳. 산 밑에 제법 큰 틈이 있다. 동굴의 입구로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천연동굴로 가이드가 우리를 끌고 들어갔다. 간신히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가 나온다. 키가 180센티쯤 되거나, 체중이 90kg 이 넘는다면 여기를 지나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애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바닥이 뻥 뚫렸다. 이삼 미터 되는 구간의 바닥이 없다. 아래를 보니 1.5미터 정도의 깊이에 바닥이 보인다.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떨어졌다가는 다리나 발목을 다칠 것이고, 자력으로는 기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가이드가 시범을 보인다. 한 면에 등을 대고 손과 발로 반대 면을 지지하면서 구간을 통과한다. 중력을 이길만한 힘이 팔다리에 필요하다. 어르신이 그럴 힘이 있을까? 칠순이 지난 선배도 함께 있는데... 등과 손은 버틸만한데, 발을 디딜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상당히 벽이 매끄럽다. 가이드가 발을 놓을 만한 지점을 일일이 짚어주며 한 명씩 통과하는 것을 도와준다. 평생 이런 자세로 이런 지점을 통과해 본 적 없는 모두가 통과에 성공했다.
새로운 장애물이 보인다. 동굴이 급격히 아래로 내려간다. 진흙이 묻어 축축한 바닥에 완전히 엉덩이를 대고 미끄럼 타듯이 내려가야 하는 구간이다. 등산복 바닥이 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축축해질 엉덩이를 어떻게 말려야지? 그렇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 가이드는 계속 앉으라고 재촉한다. 에라 모르겠다. 몸을 던졌다. 그러자 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즉생'이란 구절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100미터 정도의 좁은 동굴을 통과하자, 넓고 근사한 계곡의 옆구리로 빠져나온다. 계곡은 둥근 원형의 단면을 갖고 있다. 수천 년 동안 흐른 물이 이 근사한 협곡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바닥에 물이 없다. 간간히 고여있을 뿐이다. 동굴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일행 모두 사진 찍느라 바쁘다.
Secret은 동굴에 있었다. 동굴 같지 않은 입구,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좁은 통로, 바닥이 깊고 좁은 통로, 그리고 미끄럼 타고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간으로 이루어진 이름 없는 동굴이 비밀이다. 가이드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비밀의 동굴이다. 평범한 암산과 그 밑에 숨겨진 비밀의 동굴 그래서 여기에 'Secret'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계곡물을 막아 유원지를 만든 곳 물가에 전망 좋은 자리가 있다. 저기서 맥주나 한 잔 마시면 좋을 것 같아 앉았는데 자릿세가 200페소란다. 시원한 맥주도 없단다. 투어비(1600페소)에 점심이 포함인데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심히 궁금하다. 아침을 먹었던 구멍가게에 도착했다. 여기서 점심식사도 하고 샤워도 한단다. 오늘 트레킹의 베이스캠프였다. 점심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맥주를 마시며 내 샤워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샤워장은 큰 물통과 바가지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작고 하얀 변기가 있다. 지난 Nagpatong Rock에서 경험한 샤워장과 똑같다. 이번에는 필리핀 현지인과 같은 자세로 변기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차갑다는 느낌은 없다. 이제는 애매모호하지 않다. 두 번째의 경험이라 익숙하다. 샤워하고 난 뒤, 얼음 띄운 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난 오늘 저 동굴에 비밀 다 묻은 거지?
애매모호함으로 시작하여 환희로 오늘의 경험이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미니버스 안에서 잠이 쏟아졌다.
Secret free 된 거지?
https://maps.app.goo.gl/ee8z5Mcf2FVkQ6sz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