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달리오 _ 원칙
최근 한 철학자의 모습을 통해 삶의 실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철학자는 늘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당위성과 귀결성, 그리고 완결성을 그럴듯하게 설파합니다.
물론 공감이 됩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순간에는 딜레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딜레마에 마주치는 순간 철학은 개뿔, 실제의 삶을 위해 어떤 선택이라도 해야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따라서 철학자는 기업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정치가도 될 수 없으며, 심지어 기술자도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기업가, 정치가, 기술자들은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실존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킵니다.
삶은 실존입니다. 그리고 그 실존은 부조리합니다. 이 불완전성으로 인간은 절반의 위선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존재의 단면에는 위선이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위선을 혐오하는 사람, 철학적 높은 이상만을 진리라고 설파하는 사람, 역설적으로 이들은 모두 완벽하게 위선적인 존재입니다.
작가라는 존재도 그렇습니다. 글과 삶이 정확히 일치하는 삶을 사는 작가는 없습니다. 그저 절반의 위선을 안고, 절반의 진실을 희망삼아 하루를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책을 다시 읽습니다. 이상향을 꿈꾸고 이데아를 좇아 어렴풋이 보게된 완벽한 위선의 세계를 탈출합니다.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너무 늦게 깨달은 건 아닐지,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듭니다. 언젠가 이 이야기에 대해 다시 나눌 수 있는 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학적 이상을 좇는 것과 이를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고상하고 우아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절반의 위선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책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 첫 책으로 레이 달리오의 원칙이 떠올랐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가장 싫어하는 분야의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양가감정이 행동의 원인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책을 읽기 전에 기대평?을 먼저 남겨봅니다. 그냥 후둘겨 맞는 날이 될 것 같아요.
이제 독서를 시작합니다.